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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 나서자 남편에 대한 탄압 더 거세져”

등록 2016-04-10 20:22수정 2017-01-09 10:51

1985년 8월초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대중은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부통령’ 러닝메이트 구상을 제안했으나 바로 다음날 언론에서 ‘대통령 김대중 요구’로 왜곡보도하며 매도했다. 사진은 7월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함께 민정당 쪽에서 제안한 내각제가 아닌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8월초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대중은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부통령’ 러닝메이트 구상을 제안했으나 바로 다음날 언론에서 ‘대통령 김대중 요구’로 왜곡보도하며 매도했다. 사진은 7월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함께 민정당 쪽에서 제안한 내각제가 아닌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7회 개헌 투쟁

이희호 평전 이전 글 보기
1985년 2·12 총선 이후 신민당이 정국의 중심에 서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민정당 안에서 의원내각제 개헌 논의가 일었다.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회피하려는 전략이었다. 의원내각제 논의는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김영삼은 김대중을 비밀리에 만나 ‘민정당이 신민당의 직선제 요구를 거부하니 의원내각제 개헌을 받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다. 김대중은 즉각 반대했다. 직선제 개헌이 신민당의 약속이고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으니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김대중의 주장이었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뜻을 받아들이고 돌아섰으나 그 뒤로도 이따금 내각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김대중은 7월17일 제헌절을 맞아 성명을 냈다. “대통령 중심제건 내각책임제건 일장일단이 있지만 국민이 어느 제도를 원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의원내각제 개헌에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김대중은 성명에서 “국민 전체가 총궐기해서 선거 붐을 조성하고 후보 한 사람 앞으로 표를 몰고 갈 수 있는 대통령 선거만이 뜻대로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논거도 제시했다.

1985년 총선 진 민정당 ‘내각제’ 제안
김영삼 비밀리 만나 “받는 게 어떠냐”
김대중 “국민 요구는 직선제”라며 반대

7월 김영삼·이민우와 민추협 3자 회동
‘김영삼 대통령·김대중 부통령’ 제안
이튿날 아침신문 반대로 허위 보도
“남편을 대통령병 환자로 매도했죠”

85년 12월 민청련 의장 김근태
법정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악행 폭로
“인재근씨한테 얘기 듣고 같이 울었죠”
‘케네디인권상’ 추천해 부부 공동수상

86년 3월 개헌추진 부산지부 결성식
김대중 4만 청중 앞에 ‘민주화’ 호소
다시 가택연금당해 광주땐 녹음연설

신민당 전당대회가 8월2일로 잡혔다. 김대중은 신민당이 의원내각제 논란을 극복하고 야당의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의 구상은 정·부통령제였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남편은 강력한 야당을 만들 방안으로 역할분담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의장이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남편이 부통령 후보가 되어 함께 전국을 순회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이 생각을 언제 발표할 것이냐를 두고 고심을 했어요.” 7월10일 김대중은 이민우와 김영삼을 만나 이번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의 러닝메이트를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혔다. 두 사람이 러닝메이트가 되면 국민과 재야민주세력도 안심할 것이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확정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이민우와 김영삼은 김대중의 말을 경청했다.

다음날 아침신문 한 곳에서 ‘김영삼이 당 총재를,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를 맡는 역할분담론을 김대중이 제안했다’는 허위사실을 보도했다. 김대중은 즉각 3인 만남의 내용을 공개했지만, 김대중의 해명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 허위보도 때문에 남편은 큰 피해를 보았어요. 신문들마다 남편을 매도하기 시작했지요. 대통령병 환자라는 말도 나왔고요. 집에까지 비난 전화가 걸려왔어요. 남편의 뜻이 정반대로 왜곡된 것이었지요.” 김대중이 입은 상처는 오래갔다. 1985년 8월1~2일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두 사람의 대리인 격인 이민우가 신민당 총재로 다시 뽑혔다.

1986년 2월12일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 서명운동’에 나서자 전두환 정권은 서울 동교동 김대중·이희호의 자택을 수백명의 전투경찰과 전경버스로 봉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2월12일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 서명운동’에 나서자 전두환 정권은 서울 동교동 김대중·이희호의 자택을 수백명의 전투경찰과 전경버스로 봉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5공화국 정권은 탄압의 강도를 더 높였다. 1985년 여름에는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이 터졌다. 현장 교사들이 중심이 돼 만든 부정기 간행물 <민중교육>에 실린 글들을 ‘좌경용공’으로 낙인찍어 집필자와 발행인을 탄압한 사건이었다. <민중교육>은 이해 5월에 문공부 납입필증까지 받아 정상적으로 발행됐는데, 정권은 한 달도 더 지나 책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민중교육>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크나큰 부끄러움으로 이 책을 엮는다. 짧지 않은 세월을 교단에 서 있으면서 이 모순덩어리 교육현실에 용케도 눈감고 살아왔구나 하는 참담한 부끄러움이 머리를 들 수 없게 한다.” 이 사건으로 <민중교육>을 발간한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과 논문을 실은 현직 교사 윤재철·김진경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또 이 잡지에 시나 소설을 실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광헌을 포함한 교사 17명이 교단에서 쫓겨났다.

6월24일에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구로동맹파업의 중심은 의류제조업체 대우어패럴 노조였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1984년 생산직 노동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은 9만원(일당 2850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하숙비(한 달 12만~16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이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의 노동시간 외에 매일 2~8시간의 야간잔업을 했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한 뒤 1985년 13차례 교섭 끝에 임금을 일당 824원 올렸다. 그런데 두 달 뒤 6월22일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 3명이 구속됐다. 민주노조운동이 번져가는 것을 막으려고 정부가 직접 개입한 정권 차원의 탄압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는 파업에 들어갔다. 비슷한 처지에 있던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를 비롯한 열 곳의 노조원들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재야단체와 대학생들도 항의농성과 지원시위를 벌였다. 동맹파업은 일주일 만에 공권력과 구사대의 폭력으로 무너졌고 노동자 34명과 대학생 9명이 구속됐다. 뒤이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1200여명이 집단해고를 당했다. 구로동맹파업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앞장선 사건으로 기록됐다.

전두환 정권은 반공을 내세워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면서 뒤로는 비밀리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또 한국이 유치한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의 서울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체육회담도 열었다. 앞서 1984년 9월 남한에 큰 수해가 나자 북한 적십자사가 쌀 5만 섬과 시멘트 10만 톤을 보내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1985년 5월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 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 공연이 합의됐다. 이 합의에 따라 9월20일부터 23일까지 남쪽에서 35명의 고향방문단이 평양을 방문해 북쪽의 이산가족을 만나고, 북쪽에서 30명이 서울을 방문해 남한 친척을 만났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이산가족 만남이었다. 전두환은 김일성과 회담할 생각으로 안기부장 장세동을 북으로 보냈으나 정상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중에도 5공화국 정권은 ‘간첩 사건’을 계속 터트렸다. 9월9일 안기부는 양동화·김성만·황대권을 비롯해 20여명이 국내 대학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며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전남대 의대생 강용주도 고등학교 선배 양동화에게 포섭돼 무력봉기를 모의하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안기부에 잡혀갔다. 강용주를 고문하던 수사관은 “너 같은 놈은 씨를 말려야 한다”며 성기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검찰과 법원은 정권의 꼭두각시가 된 지 오래였다. 안기부의 의견서가 검사의 공소장이 되고 법원의 판결문은 공소장을 복사한 듯 오자까지 그대로 베꼈다. 네 사람이 사형·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 뒤에 간첩이 있다는 도식을 만들어 반독재운동에 타격을 입히려는 더러운 공작의 표본이었다.

1985년 12월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의 만행을 폭로했고, 부인 인재근은 민가협 총무로서 이를 널리 알렸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추천으로 부부는 ‘87 로버트 케네디 국제인권상’을 공동수상했다. 사진은 88년 5월 서울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시상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12월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법정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의 만행을 폭로했고, 부인 인재근은 민가협 총무로서 이를 널리 알렸다. 이희호와 김대중의 추천으로 부부는 ‘87 로버트 케네디 국제인권상’을 공동수상했다. 사진은 88년 5월 서울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시상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5년 10월20일 정부는 ‘학내외 각종 시위와 노사분규 배후에 좌경용공세력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민청련 의장을 지낸 김근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정권은 김근태를 문용식의 배후조종자로 만들어내려고 극악한 고문을 동원했다.

그해 12월19일 김근태는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고문 실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본인은 9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해 목이 트이게 하였습니다.” 김근태의 진술은 5공화국 정권의 야만성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었다. “(…) 13일 금요일입니다. 9월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이런 협박을 하면서 두 차례 전기고문과 한 차례 물고문을 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김근태는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가 가한 고문 내용도 폭로했다. 그 사내는 후에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졌다.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으로 옥사한 주범)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그런 말을 하며 이근안은 김근태를 칠성판에 눕혔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했습니다. (…)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김근태의 진술을 듣는 방청석에서는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근태의 진술은 야만의 시대에 대한 체험 보고서였다.

이희호는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 자주 만났다. “인재근씨가 1985년부터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었는데, 우리 집에 여러 차례 찾아왔어요. 김근태씨가 감옥에 있을 때였어요. 끔찍한 고문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울었지요. 먼저 민가협 총무를 한 유시춘씨도 왔지요. 동생 유시민씨가 민주화운동 하다가 감옥생활을 했잖아요. 인재근씨와 유시춘씨가 우리 집에 오면 남편도 반갑게 맞아주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1987년에 우리는 김근태·인재근 부부를 ‘로버트 케네디 국제인권상’ 후보로 추천했어요. 그래서 두 분이 그해 공동 수상자가 됐지요.”

정권의 폭압이 계속되는 중에도 신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에 속도를 냈다. 1986년 1월16일 전두환은 국정연설을 통해 개헌논의 중단을 요구했다. 들불처럼 번지는 개헌운동을 막아보려는 것이었다. 신민당은 2월12일 12대 총선 1돌을 맞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000만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1000만 서명운동으로 남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어요. 전투경찰 수백명이 집을 둘러싸고 전경버스로 집 주위를 봉쇄했지요.” 2월25일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민중의 저항에 항복해 하와이로 망명하고, 대통령 선거에 승리한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두환 정권은 개헌서명운동에 대한 처벌 방침을 밝혔다. ‘개헌 서명 옥내집회도 집시법을 적용하고, 가두서명을 받을 경우 도로교통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호별 방문으로 서명을 권유하면 주거침입죄를 적용하고, 시민의 서명행위는 불법행위 방조죄로 처벌하며, 완장·리본·어깨띠를 달면 즉심에 회부한다’는 것이었다. 협박은 먹혀들지 않았다. 신민당은 3월8일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지부 현판식을 열어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3월9일 추기경 김수환은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9일 기도’를 마무리하는 정오 미사에서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다. 3월13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000만 개헌서명운동에 동참하겠다고 천명했다. 민통련을 비롯한 다른 재야단체들도 서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대중은 3월23일 개헌추진 부산시지부 결성식에 참석해 4만명의 청중 앞에서 연설했다. “필리핀에 먼저 상륙한 봄이 이제 한국을 향해 힘차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마닐라의 봄’ 이래 ‘서울의 봄’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기대는 날로 팽창해 가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을 향해 외쳤다. “전두환 정권에 말합니다. 백성의 뜻에 복종하시오! 구속자를 석방하고 고문을 중지하고 힘없는 국민을 더 괴롭히지 마시오! 독재를 버리고 국민의 지상명령인 이 나라의 민주 회복에 협력하시오! 이것만이 그대들이 살고, 국민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이라는 것을 역사의 이름으로, 국민의 이름으로, 그리고 여기 모인 부산시민의 이름으로 엄숙히 충고합니다.”

김대중은 경찰병력이 집을 봉쇄하는 바람에 3월30일 광주에서 열린 ‘개헌추진위원회 전남도지부 결성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남편은 서재에서 연설을 녹음해서 테이프를 광주로 대신 보냈지요.” 결성식장에 김대중의 녹음 연설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한의 민족입니다. 한은 민중의 좌절된 소망을 말합니다. 광주의 한은 광주만의 한이 아니라 온 국민, 전세계 양심인의 한입니다. 광주의 한은 풀려야 합니다. (…) 광주의 한은 보복·복수로 푸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이 되는 것이 광주의 한을 푸는 유일한 길입니다. 독재자는 용서할 수 있고 협력자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정치는 결코 용서 못 합니다.” 녹음 연설을 들으며 10만 청중은 함성을 질렀다.

“그날 우리 집에 스티븐 솔라즈 미국 의원 부부가 방문했어요. 경찰이 전기를 끊어버리고 우리 집 주위를 전투경찰이 둘러싸고 있었지요. 솔라즈 의원은 귀국하면 한국의 실상을 미국 의회에 전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를 위로했지요. 남편은 경찰의 방해로 4월5일 대구지부 발족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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