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항쟁의 승리로 자유를 얻은 김대중과 이희호는 16년 만에 광주를 방문했다. 9월8일 부부는 맨 먼저 찾아간 망월동 묘지에서 80년 5월 희생된 광주항쟁 영령들에게 참배를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7년 6월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주최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에서 200만명이 참가했다. 6월항쟁의 절정이었다. 6월10일 이후 17일 동안 전국에서 시위가 2145건이나 벌어졌다. 경찰이 시민을 향해 쏜 최루탄은 35만 발에 이르렀다. 6월29일 아침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기자회견을 열어 중대 발표를 했다. ‘6·29선언’이었다.
6·29선언은 온 나라를 흥분과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노태우는 이날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 관련 사범 석방을 포함한 8개 항목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이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말도 했다. 7월1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해 노태우의 6·29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1987년 ‘6·29 선언’ 마침내 족쇄 풀려
“압수 무서워 못썼던 일지 다시 시작”
6월30일 맨먼저 이한열군 병원 방문
7월9일 끝내 숨진 열사 ‘민주국민장’
“민가협 회원들과 삼베수건 쓰고 행진”
9월8일 16년만에 광주행…역마다 환호
금남로 70만 인파 ‘환영의 함성’ 물결
망월동에서 추도사 잇지 못하고 오열
9월9일 28년만에 남편 고향 하의도행
“74년 집에 갇혀 못갔던 시부 묘소에”
김대중은 수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한 망월동에서 유가족·부상자들을 껴안은 채 통곡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노태우 대표의 선언을 듣고 정말 말로 할 수 없이 감격했어요. 이제 진짜 민주화가 이루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남편도 나에게 우리 국민의 위대함과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몇 번이나 말했어요. 우리는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지요. 6·29선언이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후보가 미리 조율한 뒤에 발표한 것이라는 게 나중에 밝혀졌지만요.” 국민은 6·29선언을 ‘항복선언’으로 받아들였다. 나라 곳곳의 맥줏집과 커피숍이 그날 하루 맥주와 커피를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국민 승리를 자축했다.
6·29선언은 전두환이 각본을 쓰고 노태우가 주연으로 나선 잘 짜인 드라마였다. 국민의 저항에 밀린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결심한 뒤 노태우에게 선언의 주역을 맡겼다. 6·29선언의 초안을 쓴 박철언은 후에 회고록에서 그때의 상황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6월23일 연희동에서 노 대표가 급히 보자고 했다. 단둘이 만났다. 어둡고 심각한 표정으로 노 대표가 말했다. ‘대통령이 ‘직선제’ 하자고 하더라. 사태 수습을 위해 그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국 타개에 자신감을 잃은 듯하더라.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오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김대중을 사면·복권하고 구속자도 석방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다.’”
9월9일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28년 만에 방문한 김대중은 이희호와 함께 74년 장례식 때도 집에 갇혀 올 수 없었던 선친의 묘소에 비로소 절을 올렸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과 이희호는 6·29선언으로 마침내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6월30일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신촌 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에 빠진 이한열이 중환자실에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한열군 아버지를 만나 위로의 말씀을 드렸지요.” 7월4일에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국 대사관에서 리셉션이 열렸다. 김대중·김영삼·김종필·노태우가 모두 참석했다. “그날 남편과 함께 갔어요. 제임스 릴리 대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김대중 옥중서신> 잘 읽었습니다’ 하고 조용히 말하던 게 기억납니다.”
7월5일 이한열이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9일 오전 연세대에서 ‘애국학생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이 열렸다. 장례식은 민주주의의 나무에 피를 뿌린 스물한 살 젊은이를 떠나보내는 엄숙한 제의이자 6월항쟁 승리를 확인하는 거국적 예식이었다. 학생·시민·정치인·재야인사 10만여명이 연세대 교정을 가득 메웠다. “그날 남편은 아침 일찍 연세대로 가고, 나도 집안일을 마치고 뒤따라 연세대로 향했지요.”
수없이 많은 만장이 7월의 하늘에 드리웠다. 추도사 마지막 순서로 전날 진주교도소에서 출감한 문익환이 연단에 올랐다. 문익환은 민주주의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젊은이 26명의 이름을 한 사람씩 목 놓아 불렀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김종태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시민들의 흐느낌 속에서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이 연단에 올랐다. 아들을 잃은 배은심은 절규했다. “이제 다 풀고 가거라. 엄마가 갚을란다. 한열아! 한열아! 가자, 우리 광주로!” 천지가 오열하는 듯 교정은 눈물의 바다가 됐다. 서울대 교수 이애주가 연세대 교문 앞에서 망자를 떠나보내는 살풀이춤을 추었다. 대숲 같은 만장을 거느린 장례 행렬은 연세대 교정을 나와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복권이 되자 김대중과 이희호는 바로 이튿날 이한열군이 사경을 헤매고 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부친(이병섭·왼쪽)을 위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신촌 로터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 30만명으로 불어난 행렬은 서울시청 앞에 이르자 100만여명에 이르렀다. “그날 우리는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광장에 나섰지요. 남편은 김영삼 총재, 문익환 목사와 나란히 걷고, 나는 이태영 선생님과 함께 걸었지요. 민가협 회원들이 머리에 삼베 수건을 쓰고 우리와 함께했는데, 나도 삼베 수건을 머리에 썼어요. 남편은 지팡이를 짚고 걸었고, 나도 관절염이 다 낫지 않았지만 한 시간 넘게 시청까지 걸어서 갔지요.”
장례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행렬의 머리가 시청에 도달했을 때도 행렬의 끝은 연세대 교정을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 행진 중간에 정부가 김대중·문익환·예춘호·김상현·백기완을 포함해 2335명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김대중의 발목을 죄고 있던 마지막 족쇄가 풀렸다. 1987년 6월항쟁은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돼 이한열의 죽음으로 끝났다. 박종철은 6월항쟁의 불씨를 던졌고, 이한열은 항쟁의 불길을 키웠다. 박종철은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영남의 아들이었고, 이한열은 광주가 길러낸 호남의 아들이었다. 박종철은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잠들었고, 이한열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혔다.
이한열 장례식의 선두에 선 민가협 회원들은 이희호와 오래 동고동락한 동지들이었다. 민가협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결성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모태였다. 자식들을 감옥에 빼앗긴 어머니들이 중심이었다. 구속자가족협의회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더해져 양심수가족협의회가 됐고, 1985년 대학생 구속자들이 크게 늘어나자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으로 확대됐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분신·투신하는 젊은이가 늘어나자 1986년 8월에 민가협 안에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 따로 만들어졌다. 유가협 중심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이 있었다.
“민가협·유가협 회원들이 동교동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왔지요. 나도 남편이랑 자식을 감옥에 빼앗겨봤기 때문에 그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찾아오면 이야기도 같이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하소연도 들어주고 도울 일을 찾아서 돕기도 했지요. 이한열군 어머니도 자주 찾아오셨고요.” 이희호는 뒤에 유가협 회원들이 쉴 집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유가족이 자꾸 늘어나니까 전국에 계신 분들이 서울에 왔을 때 머물 곳이 필요했어요. 우리 집은 너무 좁아서 수십 명씩 오면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요. 그래서 유가협 회원들이 독지가들의 글씨와 그림을 받아서 서화전을 열겠다면서 우리를 찾아왔을 때, 내 글씨를 여러 점 내드렸어요. 그 서화전에서 모금한 돈으로 1989년에 종로구 창신동에 작은 한옥을 마련했지요. 그때부터 그분들이 거기서 쉴 수 있게 됐어요.”
이희호는 1987년 7월부터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압수수색이 무서워 기록을 하지 않았어요. 6·29선언 이후로 자유를 얻게 돼 일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지요.”
6월항쟁의 승리는 사회 곳곳에 자유의 공기를 불어넣었다. 1987년 7월과 8월엔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한국 경제는 1985년 가을부터 ‘3저’(달러·국제금리·원유가 하락)에 따른 호황을 누렸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고성장이었지만 정권의 노동자 탄압으로 성장의 과실은 대기업과 특권층에게 돌아갔다. 이해 여름 억눌렸던 힘이 일거에 분출했다. 7월부터 석 달 동안 3000건이 넘는 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87년 6월 2752곳이던 단위노조가 그해 12월에는 4086곳으로 늘었고 이듬해에는 6142곳이 됐다.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를 타고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의 주체 세력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다.
1987년 7월9일 거행된 이한열 열사의 민주국민장 날, 이희호는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삼베 수건을 쓴 채 연세대부터 서울시청 광장까지 이어진 100만 시민 행진에 동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6월항쟁은 전국 규모의 대학생조직도 탄생시켰다. 1987년 5월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결성한 대학생들은 이해 8월19일 충남대에서 제1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발족시켰다. 전국의 대학 95곳이 참여했다. 전대협은 출범 선언문에서 ‘외세배격과 독재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정부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 기여,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를 목표로 내걸었다. 대학교수들도 조직화에 나섰다. 6월26일 대학민주화와 사회민주화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가 출범했다. 전국 대학교 42곳에서 664명의 교수들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또 9월17일에는 유신독재 시절에 문인들의 저항운동 속에서 탄생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조직을 재편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다시 태어났다.
자유의 바람은 언론계에도 불어닥쳐 언론악법을 차례로 제거했다. 문공부 장관 이웅희는 7월14일 언론활동의 자유를 옥죄던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10월에는 <기독교방송>(CBS)의 보도 기능이 부활했다. 11월11일 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했다. 보도지침을 만들어온 문공부 홍보조정실도 사라졌다. 민주노조운동은 언론사에도 바람을 일으켜 신문·방송사마다 노동조합이 들어섰다. 그러나 5공화국과 유착해 몸집을 불려온 거대 신문·방송들의 편파·왜곡 보도는 사라지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독재 아래서 만들어진 ‘기울어진 언론 운동장’은 6월항쟁 뒤에도 기울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김대중은 8월8일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고문으로 취임했다. 9월8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광주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남편과 나는 광주를 7월 말에 방문하려고 했는데 수해가 많이 나 9월로 미루었어요. 광주항쟁 때 목숨을 잃은 분들을 참배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광주 방문은 1971년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기차가 대전을 지날 무렵부터 역마다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리를 환호했어요.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역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숨이 막힐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대합실 지붕까지 점령했지요.”
김대중과 이희호 일행은 망월동 5·18묘역으로 향했다. 시민 수만명이 망월동을 메웠다. “남편은 망월동 묘역에서 5·18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끌어안고 통곡했지요.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잖아요. 그분들을 보니 눈물이 그치지 않았지요.” 김대중은 이희호와 함께 분향하고 묵념한 뒤 추도사를 읽었다. “영령들이여! 김대중이가 여기 왔습니다. 꼭 죽게 되었던 내가 하느님과 여러분의 가호로 죽지 않고 살아서 7년 만에 망월동의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광주! 무등산! 망월동! 감옥에서, 이국땅에서, 그리고 서울의 하늘 아래서 얼마나 나의 피눈물을 짜내고 떨리게 한 이름들이었던가! 그토록 그립고 그토록 외경스럽던 광주와 무등산과 망월동에 오니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안도감과 준엄한 심판자 앞에 선 것 같은 두려움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은 추도사를 읽는 중에도 몇 번이나 통곡했다. 망월동에 모인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그날, 금남로에 타오르던 민족의 함성은 국민이 참다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역사의 결연한 자기주장이었습니다. 20만 동학군의 죽창이 눈사태처럼 무너진 우금치 고갯마루를 지나, 3·1절의 함성과 6·10만세의 함성, 광주 애국학생의 불타는 외침이 산하에 메아리치던 모진 식민의 세월을 넘어서, 억압과 불의에 항거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웠던 4·19와 부마의거의 숭고한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온, 민족·민주·민중의 천지를 뒤흔든 함성이었습니다. 광주의 영령들이시여! 여러분은 죽어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거는 일월같이 빛나고, 여러분이 흘린 피는 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6월 민주항쟁이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룬 승리라고 말했다. 추도사는 죽은 자들을 거듭 불렀다. “광주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이 될 것이며 무등산은 민주와 통일을 밝히는 민족의 영봉이 될 것입니다. 광주 영령 여러분이 잠든 망월동의 이 초라한 공동묘역은 민족의 성지가 될 것입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와 자유와 민주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그날, 광주는 구원의 상징으로 영원한 별빛이 되어 민족의 앞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오열 속에 추도사를 끝냈다. 망월동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오월의 노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망월동 참배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천주교 광주교구청을 방문한 뒤 금남로로 갔어요. 금남로 입구에서부터 도청 앞 광장까지 1.5톤 트럭을 개조한 무개차를 타고 갔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성을 질렀지요.” 70만명을 헤아리는 시민들이 김대중의 이름을 불렀다. 6차선 도로는 인해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이튿날 이희호와 김대중은 목포와 하의도를 방문했다. 목포에서도 환영 인파가 끝없이 밀려들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하의도에 도착해 선친의 묘소를 찾아 절을 올렸다. “남편이 고향 하의도를 방문한 것은 28년 만이었어요. 1974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유신정권이 남편을 집 안에 가두어서 갈 수 없었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