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3대 대선에서 명백한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되돌릴 수 없었던 김대중은 크게 낙담했고, 이희호 역시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88년 4월26일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야 영입 바람을 일으킨 평민당은 제1야당이 되며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를 이뤄냈다. 88년 5월6일 평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추대된 김대중(왼쪽 셋째)과 부총재로 선출된 조윤형(왼쪽부터)·박영숙·문동환(수석) 의원 등이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민주화 세력에 충격을 안겼다. 노태우가 36.6%(828만표)를 얻어 1위를 하고, 이어 김영삼(28.0%, 633만표), 김대중(27.1%, 611만표), 김종필 (8.1%, 182만표) 순으로 표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희호는 개표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컴퓨터로 집계해 개표하는 방식을 그때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도무지 믿기 어려웠어요.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데 어느 지역에서는 우리 쪽 표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남궁진 비서와 둘이서 그 화면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지요. 어이가 없었어요.”
텔레비전의 개표 방송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밤 11시29분에 86.3%가 진행된 부산의 경우, 노태우 55만5963표, 김영삼 95만7886표, 김대중 19만95표, 김종필 4만3844표였는데, 31분 뒤인 12시 정각에는 노태우 55만7935표, 김영삼 96만21표, 김대중 5만8745표, 김종필 4만3969표가 됐다. 31분 동안 김대중의 표가 13만1350표나 줄어들었다. 명백한 개표 부정이었다. 부정선거 사례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17일 아침 7시에 ‘노태우 대통령 당선’이라고 커다란 활자로 뽑힌 친정부 신문 호외가 잠실 지역에 뿌려졌는데, 오전 7시 현재 후보별 득표 상황이 게재돼 있었어요. 그 시각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후보별 득표 상황과 수치가 일치했어요. 그 호외는 17일 새벽에 인쇄해 그날 오후에 뿌려야 했는데 보급소 실수로 미리 배포한 것이었다고 해요.”
87년 대선 명백한 ‘개표 부정’ 불구
구로구청·명동성당 농성도 무위로
“원통하고 분했다…‘큰죄’ 힘들었다”
훗날 김대중 “후보 양보 못해 후회”
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 ‘배수진’
‘사상 첫 여소야대’ 평민당 제1야당
“남편 국회 연설 보며 정치본업 실감”
88년 11월 ‘광주·5공’ 첫 국회 청문회
티브이 생중계 시청률 60% 기록적
증인 출석 김대중 “발포책임자 규명”
서울 구로구에서는 ‘부정 투표함 사건’이 일어났다. 투표 당일 오전 9시 부재자투표함 네 개가 든 봉고트럭을 빼돌리려는 사람들이 공정선거감시단에 붙잡혔다. 적발된 투표함에서는 노태우 후보 난에 기표된 투표용지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부정 투표함을 증거로 보전하려는 사람들은 전투경찰의 폭력진압에 밀려 구로구청 옥상으로 쫓겨 갔고, 5층 옥상에서 한 사람이 떨어져 허리가 꺾이는 중상을 입었다.
88년 5월15일 저녁 주주의 한 사람으로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방문한 김대중 총재가 송건호(오른쪽) 초대 사장 등과 함께 갓 찍혀 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읽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명동성당에서는 ‘13대 대통령 선거 무효화와 5공화국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8일 동안 항의 농성이 벌어졌다. 평화민주당은 선거결과에 불복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민주당도 13대 대선을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정권 타도 투쟁을 선언했다. 민통련 의장 문익환은 단식 농성을 벌였다. 평화민주당은 대통령 선거 부정 백서를 발간해 컴퓨터 개표 부정 사례를 낱낱이 폭로하고 컴퓨터 사전 입력과 개표 조작 증거들을 제시했다. 두 달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승훈은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2·16 선거는 컴퓨터 부정 선거였다”고 규정하고 투표 결과가 지역별·후보별로 사전에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부정선거 규탄은 선거 결과를 되돌리지 못했다.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실현을 열망하던 국민은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이희호도 김대중도 큰 충격을 받았다. “원통하고 분했어요.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해서 국민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지요.”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해서 불출마를 단행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1991년 언론 인터뷰에서도 “국민들은 단일 야당후보를 바랐고 그랬더라면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한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언론은 야당의 패인을 부정선거가 아니라 단일화 실패에서 찾았다. 왜곡·편파 보도에 앞장섰던 언론일수록 야권 분열을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남의 실책을 앞세워 자신들의 오점을 가리는 꼴이었다. “남편은 상실감에 빠져서 서재에 오래 혼자 있었어요.”
1988년 2월25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대중은 실의를 딛고 당 체제를 재정비했다. 198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2월3일 박영숙·문동환·성내운·이길재·이해찬·이상수·고영근·양성우를 비롯해 재야인사 91명이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재야세력의 대규모 진입은 정치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야권 재통합 움직임도 계속됐다.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에 당을 해체하고 들어오라고 요구했다. “남편은 통합의 조건으로 공동대표제를 제시했는데, 통일민주당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는 식이었어요. 그래서 남편은 그 제안을 거두어들였지요.”
1988년 4·26 총선에서 김대중은 평민당 총재직도 내려놓고 ‘재야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으로 회생했다. 4월26일 아침 서울 동교동 유아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나란히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가장 큰 쟁점은 선거구제 개편이었다. 민정당은 유신헌법 아래서 마련된 중선거구제 유지를 주장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씩 뽑으면 안전하게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통일민주당은 민정당이 추진하는 중선거구제를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양당의 재통합 조건으로 소선거구제 당론을 다시 제시했다. “남편은 야당이 제1당이 되려면 소선거구제로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선진국에서도 대개 소선거구제를 실시하고 있고요. 당시 국민 여론도 소선거구제를 바라고 있었지요.” 통일민주당이 받아들이지 않자 양당의 통합 협상은 겉돌다가 끝났다. 결국 민정당이 당론을 바꾸어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였다. 3월8일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일은 4월26일로 잡혔다.
4·26 총선을 앞두고 노태우는 전임 대통령 전두환과 결별하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1988년 3월18일 권력형 비리 의혹에 휩싸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명예회장 전경환이 김포공항을 거쳐 몰래 출국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전두환은 동생을 이틀 만에 귀국시켰다. 전경환은 3월29일 검찰에 연행돼 31일 구속됐다. 전경환이 구속되자 국민의 눈초리가 다시 전두환의 재임 중 비리로 쏠렸다. 전두환은 4월13일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움직여 ‘왕 위의 왕’ 노릇을 하려던 전두환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전두환은 날개가 꺾였다.
김대중은 4·26 총선에 사활을 걸었다. 3월17일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내놓고 재야 입당파인 박영숙에게 총재 대행을 맡겼다. 또 박영숙을 전국구 1번으로 올리고 김대중 자신은 전국구 11번으로 등록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평화민주당이 잘해야 30석 정도 얻을 것이라고 보았지요. 남편은 전국구 11번으로 배수진을 치고, 총선에 모든 것을 걸었어요. 주위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당이 살아나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무렵 국회의원 후보 공천 문제는 이희호에게도 괴로움을 안겼다. “공천이 가장 힘든 일이었지요. 하루 종일 집 안이 북새통이었어요.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사람들, 공천에서 탈락한 뒤 찾아와서 항의하는 사람들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어요. 어떤 사람들은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요. 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수십명이 신청서를 내는 지역구도 있었어요. 오랫동안 같이 고생하던 분들이 공천에서 탈락해 울분을 토하기도 했지요.” 공천 기간 동안 이희호와 김대중은 사람들을 피해 친지의 집을 옮겨 다니기도 했다. 1988년 3월17일부터 31일 사이에 쓴 이희호의 일지는 이동 경로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목동(이희호 여동생 집)-김 차장 댁(김옥두)-목동-밤 12시 넘어 동교동 귀가-목동-필동(이희호 큰오빠 집)-목동-동교동 귀가.’
1988년 11월18일 여소야대 국회 덕분에 성사된 광주특위 청문회가 시작됐다. 사진은 이날 첫번째 증인으로 출석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증인 선서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평화민주당 상임고문 자격으로 후보 지원 유세를 다녔다. 이희호도 유세단을 꾸려 찬조연설을 했다. 4·26 총선은 야권의 대승으로 끝났다. 민정당은 125석에 머물렀고 야권은 174석을 얻어 한국 정치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를 탄생시켰다. 이변의 주역은 평화민주당이었다. 평화민주당은 지역구 54석, 전국구 16석으로 70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통일민주당은 59석으로 제2야당이 됐고, 공화당은 35석을 얻었다. 13대 총선을 통로로 삼아 재야의 민주인사들이 대거 국회로 진출했다. 평화민주당에서는 문동환·박영숙·이해찬·이상수·정상용·박석무·이철용·양성우가 당선됐고, 통일민주당에서는 노무현·장석화·김광일이 뽑혔다. “남편은 총선 결과가 나쁘면 정치를 그만둔다는 심정으로 뛰었는데, 결과가 좋게 나와 나도 마음을 놓았지요.”
13대 총선은 극심한 지역분열을 드러내 한국 정치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를 안겨주기도 했다. 평화민주당은 광주와 전남북 선거구 37곳에서 36명을 당선시켰고, 통일민주당은 부산 선거구 15곳 중 14곳을 장악했다. 민정당은 대구 선거구 8곳을 석권하고 경북 21곳 중 17곳을 휩쓸었다. 신민주공화당도 충남 선거구 18곳 중 13곳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구조로 노태우와 민정당은 여야 타협의 정치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제1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정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4·26 총선이 끝나고 20일 뒤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한겨레신문>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의 산물이었다. 1987년 6월항쟁 뒤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돼 새 신문 창간작업에 뛰어들었고, 그해 10월부터 국민주 모집 방식으로 창간자금을 모았다.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자 국민의 참여가 폭주해 두 달 만에 목표액 50억원을 채웠다. “창간운동 시절에 남편도 <한겨레신문> 국민주를 샀지요.” 5월15일치 창간호가 나오는 날 오후 김대중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초대 사장 송건호와 함께 윤전기를 막 빠져나온 신문을 펼쳐보았다. 권언유착으로 치부한 기존 언론과 전혀 다른, 민주·통일·민권 지향의 신문이 탄생했다.
앞서 5월7일 김대중은 임시전당대회에서 평화민주당 총재로 복귀했다. 수석부총재로는 문동환이 임명됐다. 5월30일 13대 국회가 개원했다. 김대중은 이날 아침 일찍 국립묘지와 4·19묘지를 참배했다. 이희호는 집을 나서는 김대중에게 말했다. “시청으로 가면 안 돼요.” 1972년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16년 만에 다시 국회로 출근하는 남편에게 던지는 농담이었다. 그사이 국회는 서울시청 앞에서 여의도로 옮겨가 있었다. 6월29일 김대중은 제1야당 총재로서 국회에서 대표연설을 했다. 김대중은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제5공화국 유산 청산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그날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남편의 연설을 들었어요. 정치가 남편의 본업이고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희호는 국회가 개원한 뒤 평화민주당 13대 의원 부인들과 자주 만났다. “남편이 국회로 돌아가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그래서 13대 의원 부인들과 특별히 가깝게 지냈지요.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와 1990년 함평·영광 보궐선거를 함께 도우면서 더 친해졌어요. 연말이면 조를 짜서 전국 교도소를 방문하고 양말이랑 내의를 차입해 수감자들을 도왔지요.”
이해 봄 대학가에서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3월29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후보들이 ‘김일성대학교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체육대회’를 제안했다. 김일성대학교 학생위원회가 답신을 보내 그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통일운동이 열기를 뿜기 시작했다. 5월15일 명동성당 안 가톨릭교육관 옥상에서 서울대 학생 조성만이 ‘양심수 석방’,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를 요구하며 할복 투신했다. 김대중은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 6월10일 전국에서 3만명의 학생들이 연세대에 집결해 ‘6·10 남북학생회담’에 참가하겠다며 판문점 출정식을 열었다. 경찰이 학생들의 앞길을 최루탄을 쏘며 막았다. 남북학생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7월7일 대통령 노태우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 선언은 ‘남북 동포 간 상호교류’를 비롯한 6개항을 제시했다. 노태우는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대학생들의 통일운동과 공동올림픽 개최 요구를 틀어막고 발표한 7·7 선언은 노태우 정권의 비일관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학생과 재야의 올림픽 공동개최 운동은 결실 없이 끝났다.
9월17일부터 보름 동안 제24회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160개국에서 1만3000여명이 참가해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를 이루었다.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까지 모두 참여했으나 북한은 끝내 불참했다. 한국은 금 12개를 포함해 33개의 메달을 따 4위에 올랐다. 신문과 방송은 한국 선수의 활약을 열광적으로 보도했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8일 이감 중이던 미결수 12명이 호송버스와 총기를 빼앗아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주택가에서 인질극을 벌이던 탈주범 지강헌은 자살하기 직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다. 지강헌 사건은 올림픽의 영광 뒤에 숨겨진 한국 사회의 병폐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1988년 6월27일 여소야대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 ‘제5공화국 정치권력 비리조사특별위원회’(5공특위)를 설치했다. 그해 11월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 청문회가 실시됐다. 광주특위와 5공특위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청문회는 시청률이 60%에 이르렀다. “남편은 그때 광주특위 청문회 첫 번째 증인으로 나가 증언했지요.” 김대중은 청문회 증인석에서 광주학살의 발포 책임자 규명을 요구했다. 광주청문회를 통해 그동안 철저히 감춰졌던 광주학살의 실상이 일부나마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청문회에 나온 학살 책임자들은 ‘집단 발포는 자위권 행사였다’며 변명으로 일관했다. 5공특위에서는 초선 의원 노무현의 활약이 돋보였다. 특위 활동으로 전두환 일가의 거대한 부정축재 실태가 드러났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전두환은 11월23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강원도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