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75회
제6부 청와대 시간-9회 한일월드컵
제6부 청와대 시간-9회 한일월드컵
2002년 3월9일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뽑는 국민 참여 경선이 제주에서 시작됐다. 이인제·노무현·한화갑·정동영·김중권·김근태·유종근이 경선에 참여했다. 당원과 일반 유권자가 50%씩 참여해 전국 시도 16곳을 돌며 투표를 했다. 민주당 경선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50일의 드라마’였다. 민주당의 대세를 장악한 이인제와 대세에 도전하는 노무현의 바람이 맞붙었다. 국민의 관심이 일제히 민주당 경선에 쏠렸다. 가장 중요한 승부처는 민주당의 근거지인 광주였다. 3월16일 광주에서 노무현은 이인제를 누르고 1위에 올랐다.
노무현 돌풍이 거세게 불었다. 4월14일 전남 경선에서 노무현이 62%의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자 이인제는 경선을 포기했다. 4월26일 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끝까지 경선에 참여한 정동영은 2위를 기록했다. 노무현의 국민지지율은 60%에 이르렀다. 4월29일 노무현은 김대중을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정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저는 국민의 정부를 당당하게 평가하고 그렇게 소신껏 얘기하면서 후보로 뽑혀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민주당 경선이 이어지는 중에 김대중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4월9일 김대중은 무거운 몸으로 청와대에서 핀란드 대통령 타르야 할로넨과 정상회담을 했다. “오후가 됐는데 남편의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그 전부터 며칠 동안 잘 먹지를 못했어요. 의료진이 부정맥이 있다고 바로 입원하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김대중은 할로넨과 만찬을 예정보다 한 시간 앞당겨 마치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입원했다. “그날 남편이 재임 중 처음으로 입원했어요. 피로 누적과 위장 장애 때문에 6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지요.”
그 무렵 불거진 아들들 문제도 김대중의 건강 악화에 영향을 주었다. 5월이 되자 신문과 방송이 연일 둘째아들 홍업, 셋째아들 홍걸의 비리 연루 의혹 소식을 전했다. 김대중은 5월6일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아들들이 물의를 일으킨 것에 사과했다. 이희호는 신문을 볼 때마다 겁이 났다. “신문 읽기가 힘들었어요. 국민들 앞에 고개를 들기 어려웠지요. 남편은 일정이 많은데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내가 죄인이 된 것같이 괴로웠지요.” 비리 의혹 보도가 계속되자 김대중은 청와대 부속실장 김한정을 미국으로 보내 홍걸을 직접 만나보라고 지시했다. 홍걸을 만나고 온 김한정이 김대중에게 보고했다. “홍걸씨가 나서서 청탁한 일은 없습니다. 이용당한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기력을 잃었다. “수사에 성실히 응하라 하시오. 죄가 있으면 받으라 하시오.”
2002년 봄들어 홍업·홍걸 ‘구속’ 사태
밤잠 설친 김대중 건강악화 첫 입원
이희호는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까지 ‘가석방’ 홍업 눈물로 억울 호소에도
“남편 화가 풀릴 때까지 오래 걸렸죠” 5월31일 한·일월드컵 개막 ‘전국 열광’
“대표팀 선전에 박수치며 마음 달랬죠” 월드컵 폐막 하루 전 서해교전 발발
7월 북한, 분단 이후 첫 ‘사과 전통문’
9월 부산아시안게임 첫 남북 동시입장 이희호는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를 하기도 했다. “남편이 여러 차례 경고를 했지만 홍걸이가 따르지를 않았어요. 홍걸이는 미국 유학을 오래 해서 국내 사정을 잘 몰랐어요. 접근한 사업자를 너무 쉽게 믿었지요. 미국에서 귀국한 날 아버지 보기가 두려워서 청와대에 오지도 못했어요.” 홍걸은 5월18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한 달 뒤에는 둘째 홍업도 기업체에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대중은 사과성명을 냈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희호는 마음을 추스르고 감옥의 홍걸과 홍업에게 편지를 썼다. 홍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홍걸에게. 비록 어려운 처지에 있으나 오히려 오늘 처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그리고 잘못한 것을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이 너를 더욱 크게 할 것이다. (…) 나도 너의 현재를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잘못을 회개한다. 너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곳에 있는 동안 <욥기> <시편> <잠언> <이사야서> 그리고 신약을 읽어라. 특히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가 모든 책이 다 없어진다 해도 꼭 하나 갖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욥기>라고 했다. 그것은 곤욕과 질곡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 욥의 위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곳 생활을 감사의 마음으로 잘 이겨내면 너의 앞날에 희망의 빛이 반드시 비칠 것이다. 2002년 5월19일 어머니.” 이희호는 감옥에서 당뇨로 고생하는 홍업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홍업에게. 너의 모습이 야위었다고 들었다. 이젠 정말 보고 싶구나. 그곳 생활이 어려움도 많고 마음 또한 괴롭겠지만 너의 생애에 귀한 체험을 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하느님의 뜻은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환경이 바뀌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앞날이 좋은 것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네가 처음보다는 안정되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매우 기쁘다. 너는 마음이 착해서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 조금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기쁨과 희망이 너를 맞이해줄 것이다. 범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2002년 9월19일 너를 사랑하는 어머니.” 홍업이 일시 가석방됐을 때 이희호는 홍업이 보고 싶어 청와대로 불렀다. “청와대에 온 홍업이가 ‘아버지에게 누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큰절을 하는데 다리가 굽어지지 않았어요. 그대로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울었지요. 그런데도 남편이 받아주지 않았어요. 화가 풀릴 때까지 오래 걸렸지요. 홍업이는 억울함을 하소연했어요. 검찰이 사업하는 홍업이 친구를 들볶아 진술을 받아낸 뒤 홍업이를 구속했는데, 그 친구가 2008년 2월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검찰에 진술한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녹취록을 유언으로 남겼어요.” 두 아들이 구속돼 고통을 받던 시기에 이희호에게 힘을 준 사람이 둘째며느리였다. “둘째며느리가 성격이 밝고 씩씩해요. 믿음도 깊어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위안이 될 성경 구절을 찾아 나에게 알려주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쁘고 홍업이가 감옥에 있어서 힘들 텐데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자주 나를 찾아왔지요.” 홍걸은 6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홍업은 이듬해 9월 석방됐다.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는 괴로운 일이 겹쳤지만 나라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뻗쳤다. 2002년 5월31일 한·일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프랑스와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맞붙었다. ‘코리안 서포터즈’의 열렬한 응원을 받은 세네갈이 프랑스를 1 대 0으로 물리쳤다. 이변의 시작이었다. 6월4일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렸다. 귀빈석에 있던 김대중은 유상철이 골을 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국은 폴란드를 2 대 0으로 꺾고, 월드컵 출전 역사상 처음으로 1승을 올렸다.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가 김대중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경기가 끝난 뒤 김대중은 한국대표팀을 만나 감독 거스 히딩크를 꼭 껴안았다.
6월10일 한국과 미국의 예선경기가 열렸다. “나는 우리 팀이 하는 경기를 주로 텔레비전으로 보았어요. 그날도 청와대 본관에서 남편과 함께 보았지요. 아들들 일로 편치 않았지만 우리 선수들이 잘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마음을 달랬지요.” 후반 33분 안정환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미국과 1 대 1로 비겼다. 이날 붉은 옷을 입은 수십만명의 거리응원단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메웠다. 1987년 6·10항쟁 이후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사람들은 경기가 끝나고 한 시간도 안 돼 광장의 쓰레기를 말끔히 치웠다. 길거리응원이 월드컵의 또 다른 볼거리로 떠올랐다.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던 6월13일 전국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서울과 수도권을 비롯해 광역단체 16곳 중 11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당은 호남과 제주 4곳에서 당선자를 냈고 자민련은 충남 한 곳을 지켰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부산·울산·경남 지역 광역단체장 중에서 최소 한 석은 얻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과는 전패였다. 민주당 당무회의는 노무현 재신임을 의결했다.
6월14일 한국의 마지막 예선경기가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렸다. 한국은 박지성의 결승골로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제압했다. 월드컵 진출 4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대표팀이 16강전 본선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전국이 열광에 휩싸였다. 6월18일 대전에서 열린 16강전에서 한국은 이탈리아와 만났다. 응원단 ‘붉은악마’는 ‘어게인 1966’을 표어로 내걸었다. 북한이 1966년 런던 월드컵 본선에서 이탈리아를 이기고 8강에 오른 것을 상기하는 표어였다. 한국팀은 이탈리아팀을 연장전 끝에 안정환의 역전골로 물리쳤다. 이변의 연속이었다. 온 국민이 ‘붉은악마’가 돼 함성을 질렀다. 외신은 수백만명이 벌이는 길거리응원 풍경을 세계에 알렸다. 폭력이나 미움을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의 폭발이었다.
6월22일 광주에서 열린 8강전에서 한국은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을 누르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4강전에 나갔다. ‘붉은 함성’이 금남로를 뒤덮었다. 경기장 관중석에 있던 김대중은 전율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6월2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준결승전에서 한국은 독일에 0 대 1로 졌다. 아쉬운 패배였다. “그날은 나도 남편과 함께 경기장에 가서 우리 선수들을 응원했지요.” 길거리응원에 나선 650만 시민들은 한국의 분투에 환호하고 석패에 탄식했다. 한국갤럽이 6월26일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95%가 “월드컵으로 삶이 즐거워졌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7%는 거리응원에 직접 나섰고, 53%는 붉은 옷을 입고 응원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한국의 경기를 포함한 주요 경기를 녹화해 방영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은 “아시아·아프리카 가운데 준결승에 오른 것은 남조선이 처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둔 6월29일 오전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남북 해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포격으로 남한 해군 6명이 전사하고 고속정 한 척이 침몰했다.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벌어진 뒤 3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벌어진 교전이었다. “남편은 이 사건을 엄중하게 생각했지요.”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은 긴급통지문을 보냈다.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띤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됐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4주 뒤인 7월25일 북한은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내온 전통문에서 정식으로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이 전통문은 분단 이후 북한이 한국 정부에 보낸 최초의 사과 문서였다.
서해교전이 벌어진 그날 저녁 대구에서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 벌어졌다. 한국은 터키에 2 대 3으로 패했지만 경기장 안팎의 관중은 환호와 박수로 한국팀을 격려했다. 7월5일 김대중은 한국선수단, 코리안서포터즈, 붉은악마를 포함한 300명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월드컵 성공의 일등공신은 외국팀을 응원한 코리안서포터즈이고, 둘째는 붉은악마, 셋째는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히딩크 감독에게 많이 배웠다고 했어요. 지연·학연을 가리지 않고 실력으로 선수를 뽑아 키운 것은 그동안 우리 한국인들이 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남편은 히딩크 감독에게 명예국민증을 주었지요.”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6월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여중생 2명이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중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주한 미군을 규탄하고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불평등 조항 개정을 요구하는 글이 이어졌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 만행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서울에서 항의 촛불시위가 시작돼 그해 말까지 이어졌다. 12월에는 5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미국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남편은 여중생의 죽음이 부른 촛불시위를 보고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여론이 형성될 거라고 보았지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12월13일 김대중에게 전화를 걸어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사과했다.
월드컵 성공 열기를 타고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의 국민 지지율이 급상승해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 경선 승리 직후 50%를 넘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의 지지율은 20% 밑으로 추락했다. 민주당 안에서는 대선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후단협)가 만들어지고 후보 교체 논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9월29일 부산 아시안게임이 개막했다. 개회식과 폐회식에서 남북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입장했다. 같은 모양의 단복을 입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운동장을 돌았다. 남한의 이봉주가 남자 마라톤에서 1등을 하고 북한의 함봉실이 여자 마라톤에서 우승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남북녀가 함께 이룬 쾌거였다. 북한은 경제시찰단도 보냈다. 10월26일 노동당 제1부부장 장성택을 포함한 장관급 5명이 서울에 와 8박9일 동안 남한 경제를 배웠다.
11월16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과 국민통합21 대통령 후보 정몽준이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11월24일 노무현과 정몽준의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노무현이 46.8%의 지지를 얻어 42.2%에 그친 정몽준을 누르고 두 당의 단일 후보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를 25일 앞둔 시점이었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40%대로 다시 솟아올랐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2002년 5월6일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함께 두 아들 물의에 대해 사과했던 김대중은 6월21일 둘째아들 김홍업까지 구속되자 다시 한번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밤잠 설친 김대중 건강악화 첫 입원
이희호는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까지 ‘가석방’ 홍업 눈물로 억울 호소에도
“남편 화가 풀릴 때까지 오래 걸렸죠” 5월31일 한·일월드컵 개막 ‘전국 열광’
“대표팀 선전에 박수치며 마음 달랬죠” 월드컵 폐막 하루 전 서해교전 발발
7월 북한, 분단 이후 첫 ‘사과 전통문’
9월 부산아시안게임 첫 남북 동시입장 이희호는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 정신적 충격으로 구토를 하기도 했다. “남편이 여러 차례 경고를 했지만 홍걸이가 따르지를 않았어요. 홍걸이는 미국 유학을 오래 해서 국내 사정을 잘 몰랐어요. 접근한 사업자를 너무 쉽게 믿었지요. 미국에서 귀국한 날 아버지 보기가 두려워서 청와대에 오지도 못했어요.” 홍걸은 5월18일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한 달 뒤에는 둘째 홍업도 기업체에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대중은 사과성명을 냈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희호는 마음을 추스르고 감옥의 홍걸과 홍업에게 편지를 썼다. 홍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홍걸에게. 비록 어려운 처지에 있으나 오히려 오늘 처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려라. 그리고 잘못한 것을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이 너를 더욱 크게 할 것이다. (…) 나도 너의 현재를 감사드린다. 그리고 내 잘못을 회개한다. 너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곳에 있는 동안 <욥기> <시편> <잠언> <이사야서> 그리고 신약을 읽어라. 특히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가 모든 책이 다 없어진다 해도 꼭 하나 갖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욥기>라고 했다. 그것은 곤욕과 질곡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 욥의 위대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가 그곳 생활을 감사의 마음으로 잘 이겨내면 너의 앞날에 희망의 빛이 반드시 비칠 것이다. 2002년 5월19일 어머니.” 이희호는 감옥에서 당뇨로 고생하는 홍업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홍업에게. 너의 모습이 야위었다고 들었다. 이젠 정말 보고 싶구나. 그곳 생활이 어려움도 많고 마음 또한 괴롭겠지만 너의 생애에 귀한 체험을 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들겠지만 하느님의 뜻은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환경이 바뀌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앞날이 좋은 것으로 변한다고 믿는다. 네가 처음보다는 안정되고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나는 매우 기쁘다. 너는 마음이 착해서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 조금도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기쁨과 희망이 너를 맞이해줄 것이다. 범사에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2002년 9월19일 너를 사랑하는 어머니.” 홍업이 일시 가석방됐을 때 이희호는 홍업이 보고 싶어 청와대로 불렀다. “청와대에 온 홍업이가 ‘아버지에게 누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큰절을 하는데 다리가 굽어지지 않았어요. 그대로 주저앉아 두 다리를 뻗고 울었지요. 그런데도 남편이 받아주지 않았어요. 화가 풀릴 때까지 오래 걸렸지요. 홍업이는 억울함을 하소연했어요. 검찰이 사업하는 홍업이 친구를 들볶아 진술을 받아낸 뒤 홍업이를 구속했는데, 그 친구가 2008년 2월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검찰에 진술한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는 녹취록을 유언으로 남겼어요.” 두 아들이 구속돼 고통을 받던 시기에 이희호에게 힘을 준 사람이 둘째며느리였다. “둘째며느리가 성격이 밝고 씩씩해요. 믿음도 깊어서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위안이 될 성경 구절을 찾아 나에게 알려주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쁘고 홍업이가 감옥에 있어서 힘들 텐데도 내색하지 않았어요. 자주 나를 찾아왔지요.” 홍걸은 6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홍업은 이듬해 9월 석방됐다.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는 괴로운 일이 겹쳤지만 나라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뻗쳤다. 2002년 5월31일 한·일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프랑스와 세네갈이 개막전에서 맞붙었다. ‘코리안 서포터즈’의 열렬한 응원을 받은 세네갈이 프랑스를 1 대 0으로 물리쳤다. 이변의 시작이었다. 6월4일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열렸다. 귀빈석에 있던 김대중은 유상철이 골을 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국은 폴란드를 2 대 0으로 꺾고, 월드컵 출전 역사상 처음으로 1승을 올렸다.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가 김대중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경기가 끝난 뒤 김대중은 한국대표팀을 만나 감독 거스 히딩크를 꼭 껴안았다.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김대중과 이희호는 한·일 월드컵의 열광과 두 아들 구속 사태의 충격 속에 영욕의 시간을 보냈다. 그해 6월14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한-포르투갈전을 관람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월드컵 출전 48년 만에 16강전 숙원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과 히딩크 감독을 격려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일 월드컵 폐막 하루 전인 2002년 6월29일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남북 해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7월23일 전사·실종자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위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9월29일 남북 대표선수들이 부산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회식 때 분단 사상 처음으로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동시입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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