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일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주민센터에서 사전투표를 하고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나오고 있다. 강재구 기자 j9@hani.co.kr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아버지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투표소에서 사전투표를 하겠다고 측근을 통해 언론에 알린 것은 1일 오전이었다. 측근은 윤 전 총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도 할 것이라고 했다.
투표하러 가는 일정을 언론에 미리 알려 자신을 노출하는 것은 정치인들만이 하는 행동이다. 윤 전 총장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나선다는 해석이 쏟아졌다.
그런데 윤 전 총장을 대리하는 손경식 변호사가 2일 오전 갑자기 이런 내용의 문자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윤 총장님은 연로하신 아버님을 모시고 투표한 후 점심 가족식사 예정으로 남가좌동으로 가는 것이며, 현장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명이나 투표 촉구 등의 정치적 행위에 대하여는 정당인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자제함이 상당하다고 판단하십니다. 현장에서의 인터뷰나 입장표명은 없을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적극적인 정치 행보로 비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2일 오전 11시4분 윤 전 총장이 사전투표소에 도착했다.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를 부축해 투표소 안으로 들어왔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재보선 사전투표를 왜 첫 공식 일정으로 선택했나?
“···”
—투표장에 보통 부인과 오는데 부친과 온 이유는?
“보시다시피 아버님께서 기력이 정정치 않으셔서 같이 왔다.”
윤 전 총장이 투표를 마치고 11시11분 즈음 밖으로 나왔다. 기자들의 질문이 다시 쏟아졌다.
—사퇴 이후 행보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비판하는 의견이 나왔다.
“···”
—대권행보로 해석해도 될까?
“···”
—사전투표를 마쳤는데 소감 한 말씀 해달라.
“···”
—추후 입당이라든지 정치적 행보를 본격화하는 것은 언제인가?
“···”
이날 투표소 앞에는 미리 소식을 듣고 몰려온 지지자들이 있었다. 윤 전 총장은 기자들의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지지자들과는 악수했다. 윤 전 총장은 정치한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 정치를 하고 있다.
그가 쓰는 전략은 신비주의 전략이다. 정치인으로서 져야 하는 부담은 안 지고, 차기 대통령선거 주자로서 인기는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신비주의 전략은 반정치주의 전략이다. 반정치주의 전략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두고 볼 일이다.
4·7 재보궐선거에 숟가락을 얹은 윤 전 총장이 앞으로 어떤 정치적 행보를 취할까? 두 가지 선택지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의힘에 입당해 제1야당을 기반으로 대선에 도전하는 방안이다.
둘째, 당분간 제3지대에서 세력을 불린 뒤 국민의힘을 흡수하는 방안이다.
첫 번째 방안이 현실적이지만 검찰 중립성 훼손이 걸림돌이다. 두 번째 방안이 모양은 좋은데 너무 어렵다.
어느 길을 택할까? 알 수 없다. 대선주자 지지도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윤 전 총장은 어떤 정책 노선을 선택할까? 그것도 알 수 없다. 그가 보수를 택하든, 진보를 택하든 매우 어색할 것이다. 그가 경제·복지를 얘기하든 외교·안보를 얘기하든 무척 어색할 것이다.
정치적 행보나 정책 노선에 비하면 정치 노선은 매우 선명하다.
윤 전 총장이 지금 들고 있는 깃발은 ‘반문재인’, ‘반더불어민주당’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무너뜨려야 ‘윤석열 대통령’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이번 재보선을 “상식과 정의를 되찾는 출발점”이라고 규정했다. 지난 3월29일 보도된 <조선일보> 전화 인터뷰를 통해서다.
“권력을 악용한 성범죄 때문에 대한민국 제1, 제2 도시에서 막대한 국민 세금을 들여 선거를 다시 치르게 됐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런데도 선거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2차 가해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 여권이) 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를 찍어서 현 여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선거운동과 다름이 없다.
윤 전 총장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정치인 중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있다. 국민의힘에 입당하거나 제3지대에서 세를 불려 내년 3월 대선에 도전해야 하는데, ‘윤석열’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안철수 대표도 이날 사전투표를 했다. 기자들이 윤 전 총장 사전투표 효과를 물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사전투표에 대해서 많은 사람에게 좀 더 알려지게 되고 또 사전투표율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담담하다. 윤 전 총장과 안 대표는 재보선 이후 대선 국면에서 어떤 관계를 맺을까? 협력 관계일까, 투쟁 관계일까? 궁금하다.
성한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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