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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 미래

일제강점기 유학생들이 ‘과학 나무’를 그린 뜻은?

등록 2018-09-10 06:00수정 2018-09-10 09:57

[박상준의 과거창]
과학문명보급회 결성해 계몽활동
서적 내고 전국 돌며 강연회 열어
“과학은 바다, 생활은 모래 한 알”
1925년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에 실린 ‘과학의 나무’.
1925년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에 실린 ‘과학의 나무’.
1925년에 일본 도쿄에서 우리말로 된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하드커버의 고급 양장으로 400쪽이 넘는 이 책에는 육당 최남선의 서문에다 월남 이상재가 쓴 친필 휘호까지 실려 있었다. 제목은 ‘현대문명 응용과학전서(全書)’.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학기술의 뿌리는 대부분 서양에서 온 것이다. 즉 생활 곳곳에 배어 있지 않은 곳이 없는 응용과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화학, 천문학, 생물학 등등 세계와 우주를 보는 시각 역시 서양 과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근대 교양과학’으로의 전환은 과연 우리 땅에서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

서양의 물리학과 천문학은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에 처음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1906년에 출판된 ‘신찬소물리학(新撰小物理學)’을 통해 비로소 분자와 원자, 인력과 중력, 전기와 자기 등 물리학의 기본 개념들이 선을 보였고, 1908년에 나온 ‘천문학’은 테가 있는 토성의 모습이라든가 선명한 줄무늬의 목성, 또 달 표면의 상세한 지형 등을 그림으로 알렸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뒤 많은 지식인이 서양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민족의 자주를 도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 결과 여러 관련 단체들이 생겨나 다양한 계몽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1924년 일본 동경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과학문명보급회’가 주목할 행보를 보인다. 처음에 소개한 책은 바로 이 조직의 출범 이듬해에 나온 것이다.

책 앞에는 ‘세계적 대발명가 에디송옹(翁)’을 시작으로 배, 기차, 전차, 자동차, 비행기, 비행선 등의 그림이 실려 있으며, 본문은 원동력과 기계, 교통기관, 통신기관, 선박과 항공, 토목과 건축, 기계공업, 화학공업과 물리, 농림과 수산, 의류와 음식물, 주택과 연료, 각종제품과 가구, 보건과 위생, 화장(化粧) 등의 소제목으로 응용과학의 여러 분야를 폭넓게 망라하였고 그 뒤에는 과학상식문답까지 붙였다. 그야말로 책 한 권에 당대 과학기술의 모든 것을 담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맨 처음에 실려 있는 그림 한 점이다. ‘과학수(樹)’, 즉 과학의 나무라고 이름 붙인 이 그림은 우리 생활의 각 분야에 어떤 과학기술이 적용되는지를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 모양으로 표현했다. 찬찬히 살펴보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류라서 이채롭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광물, 지질, 기상, 천문은 ‘취미’라는 가지에 붙어 있고, 이들과는 동떨어진 곳에 음악, 축음기, 사진, 활동사진, 연극이 한데 모여 별도의 가지를 이룬다. 또 동물원과 식물원 옆에는 개와 고양이(犬猫)가 따로 붙어 있는데 이들이 붙은 가지는 ‘락(樂)’이라는 이름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달려 있는 거대한 나무의 몸통에는 ‘문화생활수(樹)’라고 적혀 있으며 ‘과학’이라고 쓰인 크고 굵은 글씨가 뿌리 부분을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다.

이 책의 맨 뒷장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바로 ‘과학세계’라는 잡지의 창간 안내이다. ‘조선 유일의 과학잡지’라는 수식어 아래 잡지가 어떤 식으로 꾸며질 것인지를 화려한 구호들로 알리고 있으며, 월간 발행을 전제로 구독 개월별 정가까지 안내해 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잡지가 실제로 발간되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과학잡지는 1933년에 창간된 ‘과학조선’이지만, 만약 이 ‘과학 세계’가 1920년대에 실제로 나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과학문명보급회는 잡지 발간 대신에 한반도 전국 각지를 돌며 과학강연회를 개최하여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낸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최남선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무한한 진리의 바다에 비하면 오늘날의 과학은 물가의 모래 한 알밖에 안되겠지만, 아무런 과학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 지금 우리에게는 과학 그것이 망망한 대해이고 우리의 생활은 모래 한 알도 못 되는 형편입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발간 역시 모래 한 알 같은 시작이지만 이에 만족하지 말고 과학보급에 계속 힘써주기를 당부하는 내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이 서문을 쓰고 2년 뒤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면서 훗날 오명으로 남은 친일 행적을 시작하게 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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