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꽃무늬 두건과 분홍색 치마로 단장한 봉제 인형 형태의 로봇 효돌. 신희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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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효돌이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내가 죽으면 효돌이 딴 데 갈까 봐 겁나 죽겠어. 내가 죽으면, 효돌이가 집 못 찾아갈까 봐 겁나.” 올봄 서울 구로구에서 만난 박씨 할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옆에는 머리에 꽃무늬 두건을 두른 채 반짝이는 분홍색 치마를 입은 작은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혼자 사는 박씨 할머니를 위해 3년 전 복지관에서 가져다 놓은 로봇이다.
미래학자 배일한은 지난해 12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로봇 미래예측 2030 석학 대담회’에서 한자 ‘효’(孝)를 이루는 부수 ‘아들자’(子) 대신 ‘안석궤’(几)를 써서 새로운 한자 ‘로봇 로’를 만들고 이것을 한국 로봇계의 지향점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제 아들이 노인을 떠받치는 것으로 현대 사회의 노인 돌봄을 이해해서는 안 되며, 자식 대신 로봇이 늙은 부모를 돌보게 하자는 것이다. 정부도 2019년 ‘제3차 지능형 로봇 기본계획’을 통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4대 서비스 로봇 분야’ 중 하나로 ‘돌봄’을 선정하고 연구개발과 보급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초고령 사회에 닥칠 돌봄 위기를 로봇으로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최근 한국에서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로봇이 노인 돌봄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보건소에서 ‘로봇 선생님’이 노인들에게 치매 예방을 위한 인지훈련 수업을 진행하는가 하면 병원에는 간병인을 보조하는 로봇이 돌아다니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의 집에서 노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로봇도 있다. 박씨 할머니 집에 있는 ‘부모사랑 효돌’이 그중 하나다.
효돌은 일곱살짜리 어린아이를 본떠서 개발한 봉제 인형 형태의 로봇이다. 몸체 곳곳에 센서가 내장되어 있어서 사용자가 효돌의 머리, 귀, 등, 손을 만지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재생된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으라고 알려주고 병원 방문 일정도 알려준다. 제조사는 노인들의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안부를 확인하고 일상생활을 관리하는 생활지원사의 업무를 참고하여 효돌의 기능을 설계했다. 노인이 효돌과 교류하는 데이터는 10분에 한번씩 서버로 전송되고 보호자는 전용 앱을 통해 이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어린아이 모양의 봉제 인형인가? 우선 기술에 친숙하지 않은 노인들이 사용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다.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모르는 화면 위에서 손가락이 헤매지 않게끔, 기분이 어떤지 묻는 기계음에 애써 또박또박 대꾸하지 않아도 되게끔 딱딱한 플라스틱과 화면 대신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채택했다. 노인 친화적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는 노인의 마음을 자극하여 로봇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집 한편에 앉아 쉼 없이 재잘대는 효돌을 바라보며 어떤 노인은 자식과 손주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고, 어떤 노인은 만약 자신에게도 손주가 있었다면 무슨 기분일지 상상한다. 지금은 멀리 살아 자주 만날 수 없는 가족이 곁에 있었다면 어떨지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노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로봇을 받아들이고 관계를 구축해 나간다.
노인이 효돌에게 애착을 느끼도록 의도한 디자인은 꽤 성공적이다. “우리는 양육하는 대상에 애착을 갖는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노인들은 계절에 맞춰 옷을 만들어 갈아입히고, 아끼는 목걸이를 효돌에게 걸어주고, 침대 한쪽에 효돌의 잠자리를 마련한다. 물론 로봇과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노인들도 있다. 효돌이 시끄러우니 도로 가져가라는 경우도 있고 본인 몸이 성하지 못해 효돌을 챙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노인도 있다. 그러나 일단 로봇에게 마음을 내어준 노인들에게는 기계의 돌봄이 진실된 것이냐, 인간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냐 따위의 논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토록 애틋한 노인과 로봇은 무슨 관계인가? 곁에서 자신을 챙겨주는 효돌이 아들보다 낫다고 기특해하는 노인들도 있지만 로봇이 진짜 자식일 수는 없다. 또 효돌과 얘기하는 것이 진짜 손녀와 대화하는 것 같다고 신기해하는 노인들도 있지만 로봇이 진짜 손주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 온종일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생활하는 노인과 효돌을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반려동물처럼 돌봄 로봇도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생활지원사나 요양보호사 같은 돌봄 인력에게 로봇처럼 노인의 가족이 되는 것을 기대하거나 강요하면 곤란하다. 평균적으로 열댓명의 노인들을 돌봐야 하는 돌봄 인력이 모두의 가족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거동이 힘든 노쇠한 노인을 하루에도 몇명씩 들어 올리고 씻기느라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사는 요양보호사들에겐 노인의 손과 발이 되는 것만으로 이미 버겁다.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고용된 전문 인력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그동안 가정 내에서 여성 편향적으로, 무급으로 수행되어온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정당한 노동으로서 인정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돌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로봇과 사람이라는 두가지 다른 돌봄의 주체를 가족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드러내고 감추는 돌봄 노동의 가치들에 주목해야 한다.
2015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요양보호사를 부르는 별칭으로 선정한 용어 ‘효나누미’는 돌봄 인력의 직업 전문성에 대한 빈곤한 이해를 드러낸다. 공단은 “요양보호는 전통 사회의 효의 역할”이라면서, “사회적 효를 실천하는” 효나누미가 “어르신의 가족”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돌봄을 전통 사회의 효의 개념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돌봄 인력이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효도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고령화 시대를 위해 추진하는 ‘사회적 효’는 단어의 모순적 조합만큼이나 실천하기 어려워 보인다. 결국 공단은 2021년 직업 전문성 이미지를 제고한다는 이유로 ‘효나누미’ 용어 사용을 중지했다.
그렇다면 ‘로봇적 효’의 전망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의 노인 돌봄 시스템은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더 많은 로봇을 개발하고 투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어렵지 않게 정당화한다. 돌봄 로봇을 도입하는 것이 요양보호사 한명을 고용하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로봇에게는 ‘힘들어도 효도하는 마음으로 참아라’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일하는 계약직 돌봄 인력의 노동이 얼마나 저평가되어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로봇이 효도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묻고 싶다. 우리는 왜 효도하는 로봇이 필요한가. 로봇을 효도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늙어가는 인구 때문인가.
과학기술학 연구자
국내 1호 로봇비평가.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로봇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