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기자의 사이언스온]
이런 연구 저런 발견
이런 연구 저런 발견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라는 유전자 편집 기법이 널리 쓰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이후이지만, 본래 자연계에 있던 유전자 가위의 ‘자연 현상’이 발견된 건 20여년 전이었다. 첫 발견은 박테리아에 대한 일상적인 연구에서 비롯했다.
미국 생물학자 에릭 랜더(브로드연구소)가 정리해 생물학저널 <셀>에 발표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연구의 초기 역사를 보면, 이야기는 스페인 동부의 한적한 블랑카 해안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말, 그 지역 대학교의 박사과정 학생이던 프란시스코 모히카는 강한 염분에 잘 견디는 해안가 박테리아 종의 유전체(게놈)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이 미생물의 디엔에이(DNA)에서 독특하게 반복되는 염기서열 구조를 발견했다. 교수가 되어 모교로 돌아온 모히카는 연구를 계속해 이런 구조가 다른 박테리아 종에도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그 기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런 구조엔 ‘크리스퍼’(CRISPR,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염기서열의 무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크리스퍼 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가 중요한 물음이 되었으나 한동안 가설과 추측만 제시될 뿐 밝혀지진 못했다. 모히카는 다른 생물종의 방대한 디엔에이 데이터베이스에서, 박테리아의 반복 염기서열이 다름 아니라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염기서열과 일치함을 찾아냈다. 그는 크리스퍼가 박테리아의 면역체계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를 논문으로 써서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난의 연속이었다. 논문은 2003년 11월 <네이처>에서 퇴짜를 맞고 다른 세 곳에서 거절되고서 2005년 1월에야 다른 생물학술지에 실릴 수 있었다.
다른 초기 연구는 프랑스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이뤄졌다. 사담 후세인이 생물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당시의 우려에 대응해, 탄저균 등을 정밀 식별하는 기법을 연구하던 질 베르뇨도 모히카와 비슷한 결론을 얻었으나 그의 논문도 4차례 퇴짜를 맞고 2005년 4월에야 발표됐다.
주목받는 다른 주인공은 요구르트의 젖산균을 연구하던 프랑스 미생물학자 필리프 호르바트였다. 그는 박테리아의 독특한 반복 염기서열 구조가 바이러스의 공격에 대응하는 면역체계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면역 과정에서 디엔에이를 자르는 분해효소인 ‘카스9’의 정체도 드러났다. 이어 여러 연구자의 노력이 모여, 박테리아의 크리스퍼가 카스9이라는 효소와 더불어 바이러스 침입에 대항하는 면역체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규명됐다. 자연계의 독특한 면역체계는 다시 여러 연구를 거치며 2013년 초, 박테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종의 유전자도 조절할 수 있는 유전공학 기법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크리스퍼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에릭 랜더는 “박테리아의 독특한 염기서열 구조에 대한 개인의 호기심, 생물무기에 대항하려는 군사적 대응, 요구르트 제품을 개량하려는 산업적인 요구라는 여러 연구 동기들”이 예기치 않은 큰 발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했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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