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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동안 500명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등록 2013-03-22 16:40수정 2013-03-22 19:20

깔대기에 타르 찌거기를 넣어 모래시계처럼 한 방울씩 떨어질 수 있게 만든 실험장치. 6~12년에 한 방울씩 떨어진다. 출처/ 퀸즐랜드대학, http://smp.uq.edu.au/content/pitch-drop-experiment
깔대기에 타르 찌거기를 넣어 모래시계처럼 한 방울씩 떨어질 수 있게 만든 실험장치. 6~12년에 한 방울씩 떨어진다. 출처/ 퀸즐랜드대학, http://smp.uq.edu.au/content/pitch-drop-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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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빠름의 시대’에 눈길 끄는 ‘느린 과학들’
무려 80여 년 동안 진행된 실험장치의 결과에서 논문 1편을 낸 연구도 있고, 400년 넘게 수많은 참여자들이 참여해 관측자료를 쌓아온 연구도 있고…. 연구비 지원 기간 안에 연구성과와 논문을 낼 것을 요구하는 '빠름의 시대'이기에("연구실은 논문공장이라는 자조적인 말도 간혹 들린다), 이처럼 곧바로 성과를 기약할 수 없는 지루한 관측실험의 과학이 오히려 새롭게 조명을 받는가 봅니다. 과학저널 <네이처>는 이번 호에서 보도한 "느린 과학(Slow Science)" 제목의 기획기사에서 짧게는 80여 년, 길게는 400여 년 이어진 과학 활동의 사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타르 찌꺼기의 유체 성질을 보여주고자 깔대기에 넣은 타르 찌꺼기가 6~12년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관측하는 실험장치는 85년 동안 이어지고 있고, 망원경의 우주 관측 이래 400여 년 이어진 태양흑점 수 관측 활동, 그리고 천재형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장사를 추적해온 90년 된 장기 연구, 작물 생산에 끼치는 비료의 효과를 살피기 위해 운영되기 시작한 170년 역사의 작물재배 실험장, 그리고 역시 170년 동안 화산 동향을 살피며 화산 연구의 기초를 쌓아온 관측 활동들이 오늘도 이어지는, 다섯 가지의 과학 현장이 이번 네이처 기획기사에서 다뤄졌습니다.

네이처 기획기사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이런 느릿느릿한 과학 활동은 처음에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사람의 개척자 같은 아이디어와 의지도 중요했지만, 스스로 빛나지 않으면서도 그 연구 전통을 잇고자 했던 후계 과학자들의 열정과 끈기가 있었기에, 길고도 멋진 과학의 전통과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사례가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는 느린 과학의 당양함을 다 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야생 늑대가 어떻게 가축인 개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1959년부터 벌이고 있는 옛 소련과 현 러시아 과학자들의 장기 실험도 이런 느린 과학의 한 사례가 되겠지요("늑대는 왜 개가 되기로 했나", <물바람숲>에서). 또 이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국내에서도 조용히 이뤄지는 여러 느린 과학 연구의 사례들은 아주 많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관측실험 활동에서도 단기 과제들이 있을 테고, 연구자들이 장기연구 하나에만 전념할 수도 없을 터이니 "느린 과학"이 모두가 수긍하는 과학 활동의 이상도 현실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조명을 받는 것은, 아마도 지구촌 현대 과학의 많은 부분이 유행하는 연구 주제를 좇아 "빠름, 빠름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래서 잠시나마 멈춰 서서 "느린 과학"을 보며 '빠른 과학'을 되돌아보자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용화 가능성에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단기적인 연구 목표의 성취나 당장의 논문 발표보다는 지속적인 탐구 활동을 이어가는 느리고 느린 이런 연구들은 사실, 과학이라는 게 성과에 앞서서 지적 호기심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활동임을 새삼 다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래는 네이처가 다룬 느린 과학의 사례를 간략하게 정리해본 것입니다.

네이처의 기획보도물 일부. 오른쪽 그림은 400년 전인 1613년에 태양흑점을 그린 그림. 출처/ 갈릴레오
네이처의 기획보도물 일부. 오른쪽 그림은 400년 전인 1613년에 태양흑점을 그린 그림. 출처/ 갈릴레오
400년

태양흑점 갯수 세기

네이처는 태양흑점 관측의 역사를 느린 과학의 역사로 꼽았다. 수많은 관측자들이 모은 기록들이 모이고 모여서 태양 활동을 조금씩 더 이해하는 데 쓰이고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우주 관측에 사용해 태양 흑점 현상을 기록으로 남긴 이래, 태양흑점은 주요한 천문 관측의 대상이 되었다. 1848년 스위스 천문학자에 의해 오늘날 통용되는 흑점수 계산 공식이 개발되면서 훨씬 더 체계를 갖춘 관측이 이어졌다. 2011년엔 벨기에왕립관측소의 태양영향 데이터 분석센터(Solar Influences Data Analysis Center)가 1700년 이래 500여 명 관측자가 남긴 기록, 그림, 사진을 이용해 태양흑점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네이처는 벨기에 센터가 다달이 90명가량 관측자가 전하는 태양흑점 갯수를 집계하고 있는데, 이런 관측자의 3분의 2가량이 주로 소형 광학망원경을 쓰는 아마추어 천문인이라고 전했다. 태양흑점 관측 자료는 태양 활동을 연구하고 예측하는 데 쓰인다.

170년

거대 화산 움직임 모니터링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 활동을 늘 관측하기 위해서, 애초의 관측소는 화산 근처에 세워졌다. 출처/ FRATELLI ALINARI MUS. COLLECTIONS, FLORENCE (Nature 게재)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 활동을 늘 관측하기 위해서, 애초의 관측소는 화산 근처에 세워졌다. 출처/ FRATELLI ALINARI MUS. COLLECTIONS, FLORENCE (Nature 게재)
1841년 화산인 베수비우스 산 근처에 세워진 이탈리아 베수비우스관측소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화산연구소로 손꼽힌다. 이 산은 서기 79년에 엄청난 화산 분출로 이른바 '폼페이 최후의 날'을 초래하고, 대략 3800년 전에는 나폴리 지역을 화산가스와 화산암으로 뒤덮은 바 있다. 이 때문에 이 화산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은 지금도 24시간 내내 이어진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산이 훤히 보이는 부근에 세워진 관측소는 이제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원래의 관측소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산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이 관측소는 그동안 용암의 자기적 속성에 관한 연구, 기존 지진계보다 감도가 더 뛰어난 전자기 지진계의 발명, 그리고 화산 활동의 규모 분류와 예측 연구를 비롯해 170년 동안 이 분야에서 여러 업적을 쌓아 왔다.

170년

비료의 작물생산 효과 장기시험

로삼스테드연구소가 운영하는 '전통적 실험(classical experiments)' 작물재배시험장. 출처/ http://www.rothamsted.ac.uk/
로삼스테드연구소가 운영하는 '전통적 실험(classical experiments)' 작물재배시험장. 출처/ http://www.rothamsted.ac.uk/
19세기 '비료왕'으로 통한 존 로스(John B. Lowes)가 1843년 영국 런던 북쪽의 로삼스테드 지역에 문을 연 일종의 작물재배시험장은 애초에는 비료와 거름이 작물 생산량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질소, 인, 칼륨, 나트륨, 마그네슘 같은 광물비료와 거름이 밀, 콩 등 작물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실증 연구를 벌여, 농업 분야의 과학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시대가 바뀌면서 시험 작물의 종류도 바뀌었고 유전자변형 작물(GMO)의 시험재배도 이뤄지고 연구 활동 분야는 다양화했지만, 농작물에 관한 장기 연구라는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로삼스테드연구소(Rothamsted Research)가 운영하는 이곳은 19세기 이래 실험 과정에서 수집한 30만 종의 식물과 토양 샘플을 보관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 '전통 실험' 재배장을 맡아 초기 연구 전통을 잇고 있는 앤디 맥도널드(And McDonald) 는 네이처 보도에서 "실험들이 다음 세대한테 좋은 상태로 넘겨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 실험들은 박물관 전시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과학계의 일부"라고 말한다.

90년

인간의 성장사 장기간 추적

루이스 터먼. 출처/ Wikimedia Commons
루이스 터먼. 출처/ Wikimedia Commons
1921년 미국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Lewis Terman) 교수는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른바 '천재형'의 어린이와 청소년 1500명(당시 나이 4~21살)을 뽑아 이들의 성장사를 추적해 관찰하는 장기 연구 프로젝트("Genetic Studies of Genius")를 시작했다. 관찰 대상자의 가정생활, 교육, 관심사, 능력, 개성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애초에는 터먼 교수는 '천재는 병약하며 사회성이 떨어지고 다재다능하지 못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이런 장기연구를 시작했고 이를 입증하는 관련 논문도 발표했지만, 이 장기연구의 설계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지적됐다. 대상자 선정 기준이 엄격하지 못했고, 90 퍼센트 이상이 백인과 중상층으로 이뤄졌다. 이후에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이런 문제들이 수정되고 보완되며 장기연구 프로젝트는 발전적으로 계승되었고, 이제는 심층 데이터를 갖춘 인간 성장사 장기연구 프로젝트로 손꼽힌다고 네이처는 전했다.

85년

6~12년에 한 방울 관찰

타르 찌꺼기. 망치로 치면 부스러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흐르는 유체 성질을 지니고 있다(맨위의 실험장치 사진 참조).출처/ http://smp.uq.edu.au/content/pitch-drop-experiment
타르 찌꺼기. 망치로 치면 부스러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흐르는 유체 성질을 지니고 있다(맨위의 실험장치 사진 참조).출처/ http://smp.uq.edu.au/content/pitch-drop-experiment
이색적이지만 의미 있는 주제를 연구하는 과학자한테 주는 '이그 노벨상'을 지난 2005년에 수상하기도 했던 이 연구는 1927년에 시작됐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대학 물리학과의 한 교수는 증류 뒤에 남은 타르 찌꺼기(pitch)는 망치로 치면 부스러지지만 물처럼 흐르는 유체임을 학생들한테 보여주고자 독특한 관찰실험 장치를 제작했다(맨위 사진). 유리 깔대기에 넣은 타르 찌거기가 오랜 시간이 지나며 한 방울씩 흘러 떨어지게 했다. 물리학과의 벽장 안에 보관돼 있던 이 장치는 1961년 이 대학 물리학과에 새로 부임한 존 메인스톤(John Mainstone) 교수의 눈에 띄면서 새삼 주목받게 됐다. 메인스톤 교수는 이 장치를 지속적으로 관찰하며 측정해 왔다. 관찰된 바에 의하면, 깔대기에서 타르 찌꺼기 한 방울이 떨어지는 데엔 6~16년 걸린다고 한다. 1984년에는 타르 찌꺼기의 점성이 물의 점성보다 2300억 배 높다는 내용의 논문도 발표됐다. 지난 85년 동안에 나온 단 한 편의 논문이었다. 자신에 이어 이 관찰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는 78살의 메인스톤은 이 실험의 가치는 과학에 있다기보다는 시간의 흐름과 현대생활의 속도에 관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일깨움에 있다고 말한다.

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트위터 : @water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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