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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촌지 문화를 고발하다

등록 2018-07-03 14:22수정 2018-07-06 14:49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10]
1991년 보건사회부 촌지 사건 폭로

1991년 가을, 보건사회부(보사부) 출입기자들이 해외 취재를 빙자한 기자단 여행을 다녀왔다. 경비 명목으로 대우재단과 아산재단으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제약·제과·화장품 회사한테 촌지를 요구해 받았다.

그런데 이 돈을 기자들끼리 나눠 갖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어느 기자가 촌지의 일부를 횡령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기자단 회의를 열었다. 한겨레에서 보사부를 담당하고 있던 성한용 기자는 해외여행에 끼지도 못했으나, 얼결에 그 기자단 회의 자리에 참석했다가 모든 내용을 듣고 적었다.

이를 여론매체부 편집위원(여론매체부장)이었던 정동채가 보고받았다. 정동채는 1980년 합동통신사에서 해직되기 전에, 뜻 맞는 동료 기자들과 모임을 만들어 그간 받은 촌지 전부를 노동단체 등에 기부했었다. 문제가 된 보사부 기자 가운데는 자신의 옛 동료도 있었다. 그러나 보도하기로 결정했다. 여론매체부 기자 박근애가 기사를 써서 1991년 11월 1일 사회면에 실었다.

보건사회부 기자단이 촌지를 받은 사실을 폭로한 1991년 10월 11일치 한겨레 사회면
보건사회부 기자단이 촌지를 받은 사실을 폭로한 1991년 10월 11일치 한겨레 사회면

한겨레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보건사회부에 출입하는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단이 지난 추석을 전후해 제약·제과·화장품 등 업계와 단체로부터 추석 떡값과 해외여행비 명목으로 모두 8850만 원을 거둬 나눠쓴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1991년 9월 30일 보사부기자단 운영위원(간사)인 <연합통신> 이아무개 기자에 따르면 기자단 운영위원들이 지난 추석을 전후해 대우재단과 현대그룹의 아산재단 두 곳에 직접 요청해 받은 1500만 원씩 3000만 원과 보사부 김용문 위생국장과 이강추 약정국장에게 협조를 요청해 제약·제과·화장품 업계와 약사회 등으로부터 받은 5850만원 등 모두 8850만원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 기자는 이렇게 조성한 "촌지" 사용내역에 대해 "기자단 21명 가운데 2개 신문사 기자를 뺀 19명에게 준 추석 떡값, 해외 여행경비,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기자들에게 지급한 제주도 여행경비, 두 운영위원의 개인경비, 회식비 등에 썼다"고 말했다.

보사부 기자단은 지난 9월 30일 출국해 8박 9일의 일정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응급의료체계, 사회복지시설 시찰 명목으로 여행한 바 있다.

한겨레의 특종 보도 이후 문제가 된 기자들이 사표를 냈다. 각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기자들의 촌지 수수가 사상 처음으로 공론화되었다. 당시 19명의 보사부 기자단이 모은 돈은 8850만 원이었다. 각자 465만 원씩 나눠 쓴 셈이었다. 그 시절 한겨레 기자 월급을 1년 동안 모아도 만질 수 없는 돈이었다.

보사부 기자단의 촌지 수수는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를 보도한 한겨레 1991년 10월 11일치 신문.
보사부 기자단의 촌지 수수는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를 보도한 한겨레 1991년 10월 11일치 신문.

어느 기자가 횡령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기자단 회의가 열리게 된 과정도 충격적이었다. 당시 11월 1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의 일부에는 이렇게 써있다.

이 사건은 한 경제지의 해당 부서장이 기자에게 "업계에서 보사부 기자단 이름으로 촌지를 심하게 챙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잘 처신하라"고 경고한 것이 발단이 됐다. 경제지 기자들이 업계에서 나온 정보를 토대로 1억여 원에 이른다는 촌지가 500만 원밖에 집행이 안됐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 사건은 알려지게 됐다.

한겨레가 이러한 언론계 내부의 관행에 눈감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한겨레는 당시 개별신문사로는 처음으로 윤리강령을 제정했던 터였다. ▶ 한겨레 윤리강령과 윤리강령 실천요강 전문 보기

“우리는 신문제작과 관련하여 금품 기타 부당한 이익을 얻지 않는다.”

“우리는 윤리강령에 어긋나는 금품을 정중히 사절한다.“

창간호 준비가 한창이던 1988년 5월 5일, 양평동 사옥 편집국에서 윤리강령 및 윤리강령 실천요강 선언식이 열렸다. 임재경 편집인이 강령 전문을 낭독했다. 뒤이어 모든 임직원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신홍범이 초안을 만들고 전 임직원이 토론하여 확정한 내용이었다.

실천요강에 따르면, 5만원 이하 선의의 선물 이외의 모든 금품은 거절하거나 돌려보내야 했다. 또 일반적으로 승인된 취재편의를 제외하면 취재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도록 했다.

1988년 5월 5일,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무실에서 한겨레 윤리강령 선포식이 열렸다. 임직원들이 윤리강령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88년 5월 5일,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사무실에서 한겨레 윤리강령 선포식이 열렸다. 임직원들이 윤리강령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보사부 촌지 사건과 관련해 하나 더 눈여겨볼 대목은 한국 언론계의 독특한 ‘기자단’ 문화다. 거의 모든 출입처에 주요 언론사 기자들만으로 구성된 기자단이 있었다. 기자단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권력층에 대항하는 언론인의 결사체 비슷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이후 권력의 치부를 가리고 그 대가로 기자 개인과 언론사의 이익을 취하는 담합의 온상이 됐다. 기자는 공무원이 주는 촌지를 받고 중요한 사건을 눈감았다. 관공서가 흘린 각종 개발 정보는 언론사의 돈벌이에 써먹었다. 한통속이 됐으니 부정부패가 있어도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88년 창간한 한겨레의 등장은 이들에겐 큰 위협이었다. 중견 기자들과 고위 공무원들은 한겨레 기자의 기자실 출입을 막았다. ‘너희들은 이 카르텔에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창간 때부터 윤리강령을 채택하고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한 한겨레 기자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한겨레는 초지일관했다. 공공기관의 기자실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자의적으로 결성된 기자단이 개별 기자의 출입 여부를 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취재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자실을 사용하겠다는 게 모든 한겨레 기자의 원칙이었다.

1987년 9월 1일, 서울 안국동 ’새 신문 창간 사무국’ 사무실에서 한겨레 창간 발의자 총회가 열렸다. 송건호가 ’새 신문 창간 발의’라고 붓글씨를 적고 있다. 송건호는 훗날 한겨레신문사 초대 대표이사가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9월 1일, 서울 안국동 ’새 신문 창간 사무국’ 사무실에서 한겨레 창간 발의자 총회가 열렸다. 송건호가 ’새 신문 창간 발의’라고 붓글씨를 적고 있다. 송건호는 훗날 한겨레신문사 초대 대표이사가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관공서에 비해 정당과 기업은 기자단의 장벽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끝내 문호를 열지 않았다. 한겨레 창간 당시 청와대에는 종합일간지 6개사를 비롯해 모두 17개 언론사의 출입기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초대 청와대 담당은 이원섭 기자였다. 청와대는 이원섭에게 출입증을 발급하지 않았다.

한겨레는 창간호 발행 전인 1988년 5월 9일, 청와대 출입 취재 요청 공한을 보냈다.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대해 수차례 항의하자 7월 29일 드디어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 명의의 답신이 왔다.

“종합적으로 대책을 검토하고 있으며 귀사의 요청에 즉시 응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답변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1988년 9월 9일, 송건호 대표이사가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직접 편지를 보냈다. 역시 답변이 없어, 9월 21일치 신문에 그 내용을 실어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한겨레 창간 초기였던 1988년, 청와대는 한겨레 기자에게 출입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송건호 대표이사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항의했다. 답변이 오지 않자 1988년 9월 21일치 신문에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한겨레 창간 초기였던 1988년, 청와대는 한겨레 기자에게 출입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송건호 대표이사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항의했다. 답변이 오지 않자 1988년 9월 21일치 신문에 편지 전문을 공개했다.

“한겨레신문은 다른 언론과 마찬가지로 뉴스가 있는 모든 기관 및 단체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취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입 자체를 봉쇄해 뉴스원에 대한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것은 선의로 해석하더라도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기자실이나 특별한 편의시설의 제공이 아니라 뉴스에 대한 접근권 자체라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혀왔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오늘의 브리핑룸인 춘추관을 짓고 있었는데, 기존의 기자실이 비좁아 한겨레 기자가 들어올 수 없으므로 춘추관 완공 때까지는 출입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한겨레는 “기자실에 자리를 마련해줄 필요가 없고, 취재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출입증만 내주면 된다”고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한겨레는 춘추관이 완공된 1990년 9월 30일부터 청와대 출입을 하게 된다. 창간 이후 2년 6개월여 동안 청와대를 담당했던 이원섭은 청와대 출입 한번 못 해보고 취재 부서를 옮겼다.

하지만 기자실 출입 문제나 기자단 문제가 초창기 한겨레 기자들을 그다지 괴롭히진 않았다. 국가기관이 제공하는 보도자료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 밀착하는 기사를 쓰자고 처음부터 작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간 초기 한겨레의 주요 연재 기사와 고정물이 이를 증명한다.

※ 한겨레 창간 30돌을 맞아,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한 특종이나 기획 기사의 뒷이야기를 <창간 30년, 한겨레 보도>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이 글은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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