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이르러서는 가끔 신체 능력이 과거보다 떨어진 것을 느끼게 된다. 청년 때와 달리 천천히 부드럽게 운동을 해야 부상을 피할 수 있다. 사진은 피트니스센터에서 근력강화 훈련을 하는 모습. 이병남 전 원장 제공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신청.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한 시간을 헉헉거리면서 역치까지 올라가는 체력 훈련을 끝내고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 뚝뚝 흘러내리는 땀을 닦는 나에게 피티(PT·개인훈련) 코치는 “회원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데드리프트(역기를 이용한 운동의 하나)를 한번에 40㎏씩 5회, 총 5세트를 하셨으니, 한 시간 동안 누적으로 1톤을 드신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희열이 느껴지고 기운이 솟는 걸 느꼈습니다. 수십년 만에 들은 말입니다. 30대 이후 신체는 하향곡선을 그린다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자식, 회사, 후배들의 성장에만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나이에 누군가 내게 집중하고, 내가 성장했다는 얘기를 하니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3년 전, 근력강화(웨이트) 훈련을 시작한 건 전혀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은퇴 전 어느 주말, 여러 해 동안 등산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과 모처럼 인천 부근 무의도 섬 산행을 갔지요. 험한 코스도 아니었는데 바닷가 돌길을 걷다가 발목 뒤쪽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가끔 발을 잘 접질렸던 터라 그날도 ‘그런가 보다’ 하고 등산화를 벗고 좀 주무른 뒤 다시 걸었지요. 그런데 통증이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그 후 한달 가까이 부어오른 발목이 가라앉지 않고 아파서 결국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진단 결과는 오른쪽 발목 인대 두 군데가 끊어졌고 연골이 닳아 뼈끼리 부딪쳐서 염증이 생겼다는 것이었지요. 의사는 등산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를 따라서 처음 간 설악산에 완전히 매료되어서 철마다 1년에 네번을 혼자 가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 등산을 다녔습니다. 미국서 살던 15년 동안은 아쉽게도 등산을 하지 못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 다시 산을 찾기 시작해서 거의 20년간 설악산, 오대산, 계방산,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덕유산, 영축산 등등 온갖 산을 다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등산을 못 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내 몸의 한계를 절절하게 느끼면서 마음도 많이 위축되었습니다. 좌절감이 컸습니다.
사실 저는 운동 목적보다는 산이 좋아서 오랫동안 등산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등산을 못 하게 되니까 낙담하고 아무 운동도 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저는 특별히 운동 자체를 즐겨 하는 체질이나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은퇴하고는 한동안 주중에 골프를 쳤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주중에 골프를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는데 오래된 친구들과 한산한 주중 골프장을 찾는 재미가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차차 팔꿈치, 허리, 어깨가 아파 왔습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 시술 등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의사는 고정자전거를 타고 수영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한동안 시도를 했지요. 그런데 거의 억지로 수영 레슨을 몇 차례 받다가 목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뒤로 젖힐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목 뒤 어깨 쪽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덜컥 났지요. 등산을 못 하니 수영을 하라고 했는데, 수영하다가 또 아프니….
그런데 그때 만난 의사가 해준 말이 나이가 60이 되면 의도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매년 4%씩 근육 손실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근육 손실이 여러 문제, 특히 관절에 관련된 통증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평소에 저는 실내에서 헉헉대면서 기계에서 운동하는 걸 영 마땅치 않게 생각했기에 피트니스센터는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고로 운동은 일상생활의 움직임에서 충분하고, 또 기회가 되면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호연지기를 키우면서 하는 것이 진짜 운동이지 실내에서 하는 그런 인위적인 운동은 제대로 하는 게 아니라고 아주 낮추본 것이었지요. 그런데 의사는 좋은 코치를 찾아서 근력강화 훈련을 반드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동안 뭉개다가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피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1주일에 한번만 훈련을 했습니다. 몸의 회복 속도가 느려서 두번은 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첫해에는 거의 어떤 기구도 쓰지 않고 주로 맨손운동만 시키더군요. 그래도 늘 숨을 헉헉거렸고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피티 하는 날이면 무슨 핑계를 대면 안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를 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선 것이니 어색하고 귀찮고 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피티를 시작하고 불과 두어달 만에 남의 살 같았던 목 뒤 어깨 쪽에 다시 감각이 돌아온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약도 주사도 시술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근력강화 훈련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퇴화돼 있었던 저의 등근육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이게 효과가 있구나!” 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턱걸이를 한 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턱걸이를 한번도 제대로 못 한단 말인가? 예전엔 10번도 넘게 했으니까요. 코치가 묻더군요. “마지막으로 턱걸이 하신 게 언제였습니까?” 생각해보니 50년도 넘었습니다. 맨손으로만 하는 근력운동 중에 벽에 거의 닿을 정도로 마주 보고 하는 월스쾃(스쿼트)이 있습니다. 처음엔 깊이 앉지를 못하고 뒤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년 정도 하니까 뒤로 넘어가지 않으면서 차차 종아리가 엉덩이에 닿을 정도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체의 가동 범위가 커진 것이지요.
그때 코치가 하는 말이 “회원님은 월스쾃에 관한 한 최소한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에서는 최고이십니다”였습니다. 재미로 한 얘기였겠지만, 그 말이 격려가 되었습니다. 미국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다중지능이론에서 제시한 8가지 지능 중에 신체적 지능이 있었다는 게 다시 떠올랐습니다. 아, 그동안 잠자던 나의 신체 지능이 다시 성장하는구나!
과욕이었을까요. 어느 날 피티를 하기 전에 혼자서 스트레치를 했는데, 잘해보려는 의욕이 앞서서 지나치게 상체를 굽히는 동작을 한 결과 고관절과 대둔근 쪽에 통증이 왔습니다. 마침 그때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온 코치가 나를 보더니 “회원님, 부드럽게 하셔야 합니다” 하고 지적해주었습니다. 코치가 근육을 풀어준 덕에 그날 약간 강도는 낮추었지만, 정상적으로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떨어진 신체 기능 때문에 험준한 산보다는 좀 더 쉬운 코스의 등산을 하게 된다. 이병남 전 원장 제공
그러면서 은퇴와 노화를 겪고 있는 지금 내 앞의 현실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왕복 8차선 고속도로를 5000㏄ 에쿠스로 다녔는데 이제 내 인생길은 비포장 국도에 들어서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오랫동안 고속도로를 달린 것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일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잘 해내기 위해서 그런 차로 그런 길을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나서는 그런 길을 그렇게 달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비포장 국도에서 그런 대형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는 차도 망가지고 내 갈 길도 못 가니 낭패를 당하는 것이지요. 그럼 차를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작고 실용적인 스포츠실용차(SUV)가 필요한 것 아닌가. 내가 가는 길은 달라졌는데 내 몸과 마음은 과거 삶의 방식에 너무나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어서 지금 이 현실, 이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아, 내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이 현실이 진실이다, 이 진실을 제대로 살아야 하는구나, 내 삶의 모드가 바뀌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름에 자동차 운전을 하다 보면 아주 더운 날은 에어컨을 켜고 바람이 바로 얼굴 방향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러다가 차 안의 공기가 충분히 차가워지면 바람 방향을 위아래 모드로 바꿉니다. 차 안의 온도와 나의 상태에 따라서 바람이 나오는 방향, 모드를 조정해주어야 합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계절이 바뀌면 내 삶의 모드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하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살던 모드에서 느리게 조용히 그리고 심심하게 사는 모드로 전환입니다.
은퇴 후 노년을 ‘느리게 조용히 심심하게’ 지낸다는 것은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라는 생각입니다. 생명의 본질은 성장이고 성장은 변화를 뜻합니다. 그런데 변화의 본래 작동 방식은 곡선입니다. 젊었을 때는 시작점과 도착점 사이의 직선 이동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화 속의 성장이란 변화의 본래 모습인 곡선에 다가가고 익숙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것이고, 곡선은 신의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실로 자연의 본질은 곡선입니다. 인간은 곡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직선으로 잘게 나누어 분석하지만 결국 다가가야 할 곳은 곡선입니다.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의 성격은 부드러움입니다. 기하학적 엄격함에서 자연의 부드러움으로 진화하는 것이 노년의 성장입니다.
피티를 한 지 2년째가 돼서야 이젠 한주에 두번 훈련을 해도 되겠다는 말을 코치에게 들었습니다. 훈련 강도는 계속 높아졌습니다. 하도 힘들어서, 대체 언제쯤 되어야 좀 수월해지겠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이거였습니다. “절대 쉬워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목표치를 계속 높일 거니까요.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노화 속에 퇴보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성장하려 합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책 〈경영은 사람이다〉, 〈회사에서 안녕하십니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