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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은퇴 뒤 새 삶 위해…‘사회적 탯줄’ 내 손으로 자르기

등록 2023-06-17 13:00수정 2023-08-16 18:59

[한겨레S] 이병남의 오늘도 성장하셨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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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집 마당에 자작나무 30그루를 심었습니다. 서너그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잘라내야 했지만 나머지는 아주 잘 자랐습니다. 심을 땐 비슷한 모양과 크기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유난히 굵게 큰 녀석도 있고, 키가 하늘을 찌를 듯 커진 녀석도 있습니다. 제 집에 놀러 왔다가 이 광경을 본 친구 정원관리사는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희 집 마당으로 북한산 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길이 지나가는데, 첫 바람을 온몸으로 맞은 녀석이 가장 튼실하게 컸다는 거죠. 아, 나무가 그렇듯 사람도 비바람을 맞으며 견뎌온 이가 큰 사람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잎들은 ‘자작자작’ 소리를 내고 비가 내리면 후두둑 물방울을 털어냅니다. 햇살이 비치면 온통 초록을 반사합니다. 백옥같이 하얀 몸통으로 자태를 뽐내다가 가을이 되면 황금빛 잎사귀들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잎을 다 떨구고 다음 해를 준비합니다. 해를 지날수록 잘 자란 자작나무 가지와 잎사귀들은 아주 무성해졌습니다.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마치 숲 속 터널을 지나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습니다.

소중한 것 위한 대대적 가지치기

한편, 걱정거리도 생겼습니다. 키가 큰 녀석이 쓰러져 여름 태풍에 전깃줄을 치는 사고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너무 무성한 잎 탓에 그늘이 생겨, 키가 작은 화초들의 성장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올봄, 큰 맘을 먹고 15년 만에 대대적인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나무에게 가장 중요한 뿌리와 몸통을 보전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가지들을 쳐냄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지요.

처음엔 보기에 좀 민망했습니다. 큰 녀석들은 키를 낮추고 가지도 정리하니 윗동이 잘려 뭉툭해졌거든요. 조만간 또 저절로 무성해지겠거니,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마당이 환하게 밝아지고 햇볓이 잘 드니 마당에 심은 화초들도 아주 좋아하는 듯했습니다.

요즘은 살아온 날보다 남은 시간이 훨씬 짧다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과연 몇년이나 더 명정한 정신력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육체적으로는 아흔을 넘기고 100살을 바라볼 수 있다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데 생각이 머물자, 내 인생도 가지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는데 남은 삶에서 뭐가 중요하고,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 소위 “뭣이 중헌디?”라는 질문이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근래에 가까운 몇몇 사람이 아프면서부터입니다. 삶과 죽음이 저 멀리 생각 속에 있는 게 아닌, 현실로 다가오면서 참 안타깝습니다. 나에게도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기에 소중한 사람들과의 사랑의 물길을 확보하고 생명의 물이 흐르도록 하는 것, 남은 삶에서 이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가지치기하면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겠지요. 나무의 윗동과 가지를 친 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뿌리를 보전하고 둥치가 더 잘 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려놓고 고통스러웠지만…

며칠 전 태아와 신생아에 관해 얘기하는 한 인터뷰 영상을 봤습니다. 엄마 배 속에서 태아는 오로지 탯줄 하나에 의존해서 생명을 이어갑니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탯줄이 끊어지면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신생아로 태어나면 이 탯줄은 끊어져야 합니다. 세상에 나왔는데도 그 전의 익숙하고 편안했던 탯줄에 여전히 의지하려고 하면 새 세상에서 맞는 건 죽음일 겁니다. 탯줄을 끊어야 숨을 쉬고 살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그 배를 버리라고 합니다. 물이라는 세상에서 배는 생명을 지켜주는 도구지만, 땅이라는 세상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라는 거지요.

회사에서 퇴임하고 2년간 사외이사·초빙교수직을 이어가다 모두 사임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뭔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은퇴 뒤엔 좀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몸이 오랫동안 익숙했던 ‘사회적 탯줄’에 의지하고 있는 듯한데 그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던 것이었지요. 남들이 해주는 이런저런 얘기들은 제겐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시간을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모두 만류했지만 저는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몇 새로운 자리에 대한 제안이 있었는데 모두 고사했습니다. 완전히 달라진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면 내 삶의 방식도 완전히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어떻게 보면 좀 막연한 확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두 사임하고 또 고사하고 나서는 후회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안전한 자궁 밖으로 나온 신생아는 숨을 쉬며 목청 높여 울게 마련이지요. 은퇴 후에 내 삶의 현실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라고 확실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몇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내 손으로 탯줄을 자르며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 남들이 탯줄을 잘라줍니다. 그런데 은퇴와 노화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그 마음의 탯줄을 자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내가 마주한 새로운 세상이 제대로 보이면서, ‘참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을 가지치기하고 마음의 탯줄을 자를 때, 새로운 기운으로 새롭게 살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집요하게 사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은퇴 뒤 삶의 방향은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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