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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코로나 시대, ‘옆 사람의 존재’ 불안해도 체온은 그립다

등록 2021-05-15 08:56수정 2021-05-15 14:51

[토요판] 커버스토리
코로나19 시대의 왕진의사들

다양한 이유로 진료실 못 오는 이들
말기 암 환자, 장애인, 시골 어르신 등
사각지대 취약계층 환자 점점 많아져

코로나19·고령화로 의료 패러다임 전환
방문진료, 개별 의사 선의에 기대지 말고
사회 시스템으로 만들어 다수가 누려야
5월3일 오후 양창모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 센터장,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왼쪽부터)이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5월3일 오후 양창모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 센터장,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왼쪽부터)이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밝게 웃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청진기가 담긴 갈색 가죽 왕진가방을 든 의사는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옛날 신문을 보면 “의사한테 진료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가난한 이들의 집으로 왕진의사들이 당연한 것처럼 발걸음을 했다. 세쌍둥이를 받기 위해 한겨울 눈길을 뚫고 해발 1080m 높이의 강원도 정선 탄광에 간 왕진의사, 고열·설사를 앓는 고교생 환자를 보러 서울 북가좌동 판자촌에 왕진 갔다가 의사(의심스러운) 장티푸스 환자 500여명을 초기 발견한 왕진의사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서울 영등포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중태에 빠진 환자를 왕진하지 않았던 의사가 당시 국민의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사례도 있다.

지난 3일, 서울 중구 한 콘퍼런스룸에서 양창모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장,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살림의원) 원장,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대표원장을 만났다. 이들은 환자가 부르는 곳으로 찾아가는 ‘21세기 왕진의사’들이다. ‘3분 진료’밖에 할 수 없는 갑갑한 진료실을 벗어나 환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넉넉한 시간과 의술을 쓰는 이들이다.

“전 레모네이드요.” “저도, 레모네이드.” “커피 좋아하는데(웃음), 오후에는 못 마셔요.”

아이스아메리카노 석 잔을 시키면 무난하겠다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직업정신 때문일까.

“오늘 진료는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양창모 센터장이 맨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은 방문 일정을 안 잡았어요.”

홍종원 원장은 인터뷰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했다.

“아니, 다들 쉬고 계신 것인가요?”

양 원장이 짐짓 농담을 하자, 추혜인 원장이 재빨리 반응했다.

“아뇨! 저 오전에 왕진 갔다 왔어요!”

추 원장이 이날 다녀온 이야기를 시작하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코로나19 시대 왕진을 다니며 만난 의료 취약계층의 삶은 어떨까? 지역사회에 가장 밀착해서, 소외된 이들의 진료를 책임지는 세 의사에게 고립된 사람들은 엄혹한 이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어떻게 이 시기를 현명하게 보낼 수 있을지 물었다. 50대 초반의 양 센터장과 40대 추 원장, 30대 홍 원장, 세 의사는 경험과 세대는 다르지만 현재의 공급자 중심 의료 체계가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의료 패러다임이 조금 바뀌면 좋겠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첨단의학 시대, 왜 다시 왕진인가

좌담을 진행한 날, 추 원장은 서울 은평구의 한 지적장애인 시설에 방문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고 왔다. 의사가 시설에 직접 방문해 접종하면 보건소에서 순서를 조금 앞당겨준다고 해 시설과 협의한 뒤 진행한 것이다. 추 원장은 “지적장애인 시설이다 보니 마스크 쓰고, 손 씻고, 사회적 거리두기 하는 게 조금 힘드신 분들이 있다. 그래서 조금 더 빨리 맞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고 했다.

추 원장이 일하는 서울 은평구 살림의원은 의사가 동네 주민들의 집으로 방문해 진료하는 몇 안 되는 의원이다. 살림의원은 2012년 문을 연 뒤 9년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운영해왔는데, 현재 조합원은 3500여명에 이른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3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명, 부인과 전문의 1명, 치과 전문의 3명이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진료’를 지향하고 있다.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방문진료 중 청진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추혜인 원장 제공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방문진료 중 청진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있다. 추혜인 원장 제공

지적장애인들에게 코로나19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는가?

추혜인(이하 추) 이해가 가능한 분들에게는 최대한 쉽게 직접 설명을 드린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곳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님들에게 부작용과 유의사항을 꼼꼼히 체크해드리고 있다.

―오늘 만난 분들은 백신 접종 공포가 있었는지?

큰 공포는 없으셨다. 시설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은 매년 독감이나 파상풍 예방접종 등으로 주사를 맞으셔서 주사 자체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다. 으레 하는 예방접종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2019년 서울 강북구 방문의료전문클리닉 건강의집의원에서 일을 시작한 홍종원 대표원장은 처음 왕진을 갔을 때를 떠올리며 난감했다고 한다. “제가 환자분들 집에 찾아가 전문적인 의료서비스를 잘할 수 있을까,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는 홍 원장은 진료실에서 진찰하는 외래진료는 거의 하지 않는다. 가정전문간호와 방문진료 등을 전문으로 하는 건강의집의원은 주로 복지관, 동주민센터, 재가요양센터, 상급병원 등의 기관들로부터 방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환자들을 소개받는다. 최근에는 환자의 보호자들이 의원에 전화해 왕진을 문의하기도 한다.

―어떤 분들이 주로 왕진을 신청하나?

홍종원(이하 홍) ‘애매한’ 혹은 ‘난처한’ 상황에서 저희한테 연락한다. 예를 들면, 말기 암 환자분이 계셨다. 병원에선 치료가 다 끝났다고 한다. 환자분은 집에 가시거나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보셔야 하는 상황인데, 호스피스 병원은 많지 않고 대기도 길다. 보호자 입장에서 치료를 더 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한테 전화한다.

홍 원장님 말씀대로, 왕진을 신청하는 분들은 ‘애매한’ 상황에 놓인 분들이 많다. 입원을 해야 하는지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겠는데 당장 병원에서 진료받기는 힘들 때, 왕진을 신청하신다. 환자나 보호자분들은 방문한 의사가 모든 검사나 처치를 다 하길 기대하진 않으신다. 그보다는 애매한 상황에서 갈피를 잡는 일을 저희들이 도와드리고 있다.

양창모(이하 양) 저는 강원 춘천 시외에 있는 소양강댐 수몰 지역의 농촌으로 왕진을 간다. 저희 센터에서 환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데 짧으면 30분, 길면 1시간 반이다. 그렇게 이동해서 환자를 보는 데 다시 1시간이다. 거의 두세 시간을 한 환자를 보는 데 들이고 있다. 주로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을 앓으시는 시골 어르신들을 만난다.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소속 호호방문진료센터는 지난해 ‘소양강댐 주변 지역 방문 의료서비스 사업’을 실시하면서 농촌 주민들에게 찾아가는 의료를 선보이고 있다. 댐 조성으로 수몰된 지역에 사는 주민을 위해 한국수자원공사가 사회공헌사업의 일종으로 하는 사업이다. 양 센터장은 20년간 왕진 업무 경력이 있는 간호사 한명, 마을활동가 한명과 함께 팀을 이뤄 병원이 너무 먼 지역 주민들의 집을 직접 방문한다.

우선 ‘왕진’이란 말 자체를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최근 왕진 경험을 담은 에세이 책 <아픔이 마중하는 세계에서>를 내면서 대학생 조카한테 왕진 에세이를 냈다고 말했더니, “왕진이 뭐야? 왕이 진격하는 거야?” 그렇게 반문해서 제가 깜짝 놀랐다. 왕진이란 말 자체가 너무 낯선 세대가 있더라.

옛날엔 드물지 않았던 왕진이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다. 사실 저도 30대라 잘은 모른다.(다들 웃음) 의료 자원은 부족하고 의사들이 많은 환자를 봐야 했던 상황에서 병원 중심으로 의료 제도가 정비된 것 같다.

소비자 중심 세상에 의료만 공급자 중심

어느 순간 왕진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개념이 됐다. ‘의사 선생님’은 의료기기를 갖춘 병원에서 환자가 직접 찾아가야 오랜 대기 끝에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의료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고 건강보험급여 부당 지급을 방지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의료 관련법이 정비되면서 병원 밖에서 진료는 특별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고령사회에 빠르게 접어들면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장애인 등 병원 진료실에 찾아오지 못하는 의료 취약계층이 늘고 있다. 농촌 고령자, 말기 암 환자, 정신장애인 등은 의료 취약계층으로서 왕진 서비스를 요청하는 주요 수요자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도 진료받을 권리, 지역사회에 머물며 돌봄받을 권리 등이 의료계에서 최근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공의 시절이던 2003년, 한 장애인 단체의 제안으로 처음 왕진을 갔다.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을 진료하러 왕진을 와달라고 했다. 그때 뭘 가져가야 할지, 가서 뭘 진찰해야 할지 잘 몰랐다. 처음 가는 것이니까. 어쨌든 그냥 갔는데, 환자분들이 엄청 반기는 거다. 의사가 집에 온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의사여서 반기는 게 아니고 그분들에게 사람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반가운 것이었다. 실은 의사들도 왕진이 굉장히 낯선 일이다. 대학 다닐 때나 수련 과정에서 왕진을 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저는 학생 때 왕진을 경험했다. 지역사회 의학 실습으로 인천의 한 철거촌에 왕진을 나갔다. 엄청 특별한 진료를 한 건 아니었는데 고혈압, 당뇨 같은 만성질환을 갖고 있는 철거민들을 진료하고, 잘 지내시는지 확인하고 함께 식사하고 돌아왔다.

의과대학 과정에 지역사회 실습이 아주 간혹 있다. 대학 때 우연히 봉사 동아리를 통해서 왕진을 갔다. 그 덕에 지금 이 모양이 됐다.(웃음) 의과대학 다닐 때 의료 현장이라 함은 곧 병원을 말한다. 병원에서 활발하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게 의대 교육이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환자 집으로 찾아가 거창한 의료기기도 없이 진료하는 것을 하찮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대 교육과정에선 왕진이라고 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제가 학교 다닐 때를 떠올려봐도 그런 분위기였다.

지금 의료 시스템 자체가 이윤 창출에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재편되어 있다. 효율성이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전혀 투자하지 않는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 바꿔 생각하면, 왕진은 굉장히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의사가 이동하는 데 든 시간만 중요한 게 아니다. 환자가 병원에 찾아오는 시간도 중요하다. 어떤 시스템이 효율적이라고 말할 때 그 주어가 누구인지 짚어봐야 한다. 의사에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모든 사람에게 비효율적인 듯 이야기하는 건 조금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가.

병원의 의료 환경에서는 장비, 직원 등 모든 것들이 의사의 퍼포먼스를 받쳐준다. 거기에 총아처럼 의사가 빛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게 현대 병원 의료 시스템이다. 반면, 왕진을 가면 맨몸으로 부딪친다. 조금 두렵기도 하고, 병원에서만큼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왕진도 동주민센터나 사회복지관의 사회복지사,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의 방문간호사 등과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의료의 질이 달라진다.

한국은 의료접근성이 좋은 편이라고 하지만, 왕진 가는 의사들은 의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위기 상황으로 내몰린 환자들을 자주 만난다.

몇 달 전 일이다. 증상이 꽤 심각한 정신질환을 가진 환자분이 20년 동안 그냥 집에 계셨더라. 20년 가까이 병을 앓으면서 약을 복용한 적도 없이 칩거하신 상황이었다. 가족들이 용기 내어 저한테 연락을 한 경우였는데, 저도 많이 놀랐다.

집에서 못 나오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고전적 의미의 왕진인데, 제가 실제 만나는 분들은 집에서 완전히 못 나오는 분들은 많지 않다. 거동이 가능하지만 병원이 너무 멀거나, 지병으로 병원 가는 길이 힘든 분들도 왕진이 필요하다. 고전적 왕진 대상자가 아니지만 다양한 이유로 병원 오기 힘든 분들까지, 왕진의 대상자를 넓혀야 한다. 지난주에 만난 할머니의 경우, 병원에 갈 때 타야 하는 시내버스가 오전 9시30분에 집 앞 버스정류장에 온다. 그런데 할머니는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더라. 집에서 버스정류장이 300m 떨어졌는데, 몸이 불편하니 미리 가 있기 위해 2시간30분이나 먼저 나가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다리가 오자형으로 바뀌어 있다. 이동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렇게 일찍 나가는 거다.

돌발 상황으로 갑자기 환자분을 뵙지 못하는 ‘노쇼’ 경험이 가끔 있다. 어떨 땐 뵙고 어떨 땐 못 뵙는 분이 계셨다. 전화도 잘 닿지 않았다. 음주도 하시고 배회하는 증상이 있는 분이었다. 인연이 닿으면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서, 안 계셔도 가고 또 가고 찾아다닌다. 만나서 약을 드리든 뭘 하든 내가 할 수 있는 뭐라도 해볼까 하는 거다. 사실 못 만난다면 효율의 관점에선 그날 저는 아무것도 안 한 거다. 하지만 이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기쁘다. 만나는 분에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이 방문진료 중 환자에게 질병을 설명하는 모습. 홍종원 원장 제공
홍종원 건강의집의원 원장이 방문진료 중 환자에게 질병을 설명하는 모습. 홍종원 원장 제공

저희 의원에서는 방문진료팀이 아닌 다른 직원들도 한 번 이상 환자분 가정에 다녀오시도록 하고 있다. 방문하고 나면 그다음엔 병원에 못 오시는 환자분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휠체어를 타고 오시는 분들을 응대하는 게 확실히 달라진다. 이렇게 환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험들이 모든 의료인에게 필요한 것 같다.

가족들과 관계 끊어진 농촌 노인들

―이 해괴한 코로나19라는 상황을 시골 어르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나?

‘코로나’라는 이름 자체를 헷갈려하신다. ‘콜레라’ 이렇게 이야기하시기도 한다. 무엇보다 요즘엔 백신 접종이 관건인데, 백신에 대한 공포감이 심하다. 저번달 왕진을 갔을 때, 대략 열명한테 ‘접종 신청하셨냐’ 여쭤봤다. 다섯명 정도밖에 신청을 안 했다고 하신다. 제 연락처를 아는 한 환자분은 저한테 카톡으로 백신 접종을 하면 안 된다는 동영상을 보내오셨다. 정부가 집단면역을 목표로 한다면 단지 접종 신청만 받을 것이 아니라 더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늘 마스크를 써야 하고, 모일 수도 없는 상황을 어르신들은 잘 실천하고 계신지?

자연스럽게 격리되어 계신다. 일단 가족들의 관계는 이미 끊어졌다. 얼마 전 갔던 집도 어르신들이 손주 못 본 지가 벌써 2년 됐다고 한다. 동네 이웃들과의 사회적 관계는 마을회관이 문을 닫아 단절됐다. 거의 고립돼 있는 것인데, 그걸 왕진 가보면 금방 느낀다. 단적인 예로, 제가 방문하면 집에 30분에서 1시간 정도 앉아 있는다. 어르신들이 커피믹스를 주실 때가 가끔 있다. 그런데 그 커피믹스를 “어르신 저 이제 갈게요” 하면 내오신다. “어, 그런데 커피는 마시고 가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거 마시면서 한 20~30분 더 이야기하자는 뜻으로 내오시는 거다.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일단 사람이 왔으니 더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거다.

고립감은 코로나19 시대에 중요한 이슈 같다. 백신도 중요하고 모든 게 다 중요한데, 관계의 고립에서 오는 고독감이 코로나19 이상으로 저희가 만나는 환자분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세심히 살펴보려고 한다. 코로나19는 의료의 패러다임을 환자가 의사를 찾아오는 것에서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는 것으로 바꾸는 계기일 수 있다. 단순히 의사가 간다, 집으로 찾아간다, 이걸 넘어서 의료라는 것의 본질인 사람의 생로병사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왕진이다. 일종의 의료 형태를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이후 터져나오는 왕진 수요

보건복지부는 최근 몇 년 사이 지역사회 통합돌봄, 커뮤니티 케어 등 여러 방식으로 병원 진료실만이 아닌 환자가 늘 살던 지역사회와 집에서 의료서비스를 받는 재택 의료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거동이 불편해 의료기관에 직접 가기 어려운 환자의 가정에 지역 의원의 의사가 방문해 진료하는 ‘일차의료 방문진료(왕진) 수가 시범사업’이 2019년 12월 시작됐다. 이 사업의 1차 공모에 참여한 의원이 전국 348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환자들은 방문진료를 어디에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2018년 5월부터 실시된 장애인 주치의 제도는 의료접근성이 낮은 중증 장애인이 거주 지역에서 의료기관의 의사 한명을 관리의사로 선택해 장애 관련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리받는 제도다. 약간의 본인 부담금을 내면 대상자는 의사가 집에 방문하는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의료 패러다임이 변하는 실마리가 느껴지나?

재택 의료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병원에서 환자와 가족들 간의 면회가 제한되자 재택 의료(방문진료, 방문간호 등)에 대한 수요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왕진을 신청하는 분들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호스피스 병원에 가려 해도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제한된다. 호스피스 병원에 자리가 났다고 해도 입원을 거절하고 집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분들도 많아졌다. 면회도 불가능한 채 고립되어 병원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니, 선택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또한 장례식에서도 왕진 신청이 들어온다. 최근 제가 왕진 가던 분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 보호자분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 장례식에 조문 온 다른 분이 저에게 왕진을 신청하셨다. 왕진이 가능하다면 요양병원에 계신 자신의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고 싶다는 것이다. 코로나19 감염병이 확산되며 요양병원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진다.

코로나19 의심으로 열이 나는 경우 응급실에서도 안 받아주다 보니 저희한테 연락이 온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서 요양원에 있는 환자들에 대해 저희한테 진료 요청이 좀 더 들어온다. 코로나19로 인해 재택 의료를 원하는 분들이 더 있다. 어쨌든 병원 중심의 의료서비스가 조금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희 살림의원에 왕진 신청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가 언제냐면, 인터넷에 기사가 나온 뒤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한번 나오면 왕진 신청이―저희 병원은 서울 은평구인데―양천구, 강서구 이런 곳에서도 신청이 들어온다. 그만큼 지역의 왕진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왕진을 받고 싶어 하는 분들은 많은데, 어디에 신청해야 하는지 모르다가 인터넷에서 기사가 나면 보고 우르르 신청하시는 거다.

기존에 질환이 있는데 병원 접근이 힘들어진 분들의 왕진 신청이 많다. 노인 질환 대부분이 코로나19라고 해서 병원에 안 갈 수가 없다. 혈압약, 당뇨약은 타러 가야 하는 거다.

양창모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 센터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양창모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 센터장.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지난 6일 강원도 한 지역에 왕진을 간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의 양창모 센터장과 최희선 간호사. 염증이 생긴 환자의 팔에 드레싱을 하고 있다. 양창모 센터장 제공
지난 6일 강원도 한 지역에 왕진을 간 춘천 호호방문진료센터의 양창모 센터장과 최희선 간호사. 염증이 생긴 환자의 팔에 드레싱을 하고 있다. 양창모 센터장 제공

양 센터장은 ‘왕진’과 ‘방문진료’는 비슷하지만 구분해야 할 개념이라고 말했다. 왕진이 개별 의사의 의료 행위에 가까운 말이라면, 방문진료는 하나의 시스템을 뜻하는 말에 가깝다. 그는 방문진료가 동네의원에서만이 아닌 공공의료에서 정기적으로 지역사회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체계적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왕진은 동네의원의 자발적 신청에 따라 행해지도록 정부가 민간의료에 맡기고 있는데, 국민들이 체계적으로 왕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공공의료에서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면, 보건소에서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방문진료 서비스를 하면 좋겠다고 세 의사는 한목소리를 냈다. 지금 선별진료소 운영 등 코로나19 대응으로 분주한 보건소가 앞으로 지역사회에 필요한 방문진료 서비스 특화기관으로 발전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어떻게 이길까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버텨야 할까?

방문진료를 하는 의사의 시선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의 여유라고 생각한다. 백신도 중요하고 방역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건강 돌봄에 신경을 더 쓰는 게 지금 필요하다. 마스크 쓰기와 손 씻기는 다들 잘하고 계시니까 나머지 것들을 챙길 때다. 가볍게 산책을 하거나 음식을 잘 챙겨 먹고 가족이나 이웃과 조금이라도 소통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현명하다. 사실,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극복할 때 의학적 기술이나 거대한 의료 시스템에 기대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일부분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19는 과연 언제쯤 끝날까? 환자들에게 이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변하나?

추 저는 코로나19가 빨리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세계에서 계속 변이 바이러스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으니, 파상공세처럼 앞으로 올 파도들은 없어지지 않고 한참 이어질 것이다. 기껏 갖춘 생활 방식들, 예를 들면 손을 잘 씻고, 음식을 각자 덜어 먹는 건강한 습관들을 계속하면서 직접 접촉을 줄이는 것을 유지하면 좋겠다. 그러면서 마음의 연결들은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 지인들의 안부를 자주 확인할 수 있도록 소통 채널을 강화했으면 한다.

의료는 코로나를 계기로 극단으로 두 가지 길을 갈 것 같다. 한편으로는 비대면 중심의 원격 의료서비스 발전으로 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사회 의료서비스가 많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갈 것이다. 두 가지가 겹쳐져서 활용돼야 한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은 있다. 기술을 통해 보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때로는 인간관계를 협소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의료 체계가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면 개인 여건에 따라 건강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망을 코로나19임에도 유지할 수 있는 계층과 아닌 계층으로 나뉠 우려가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보면서 고 신영복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생각났다. 신 선생은 책에서 여름철 감방과 겨울철 감방이 다르다고 하셨다. 여름철엔 더우니까 옆에 누운 사람이 체온 때문에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고, 겨울철엔 추우니까 옆에 누운 사람이 그 온기 덕분에 고마운 존재가 된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지금 그런 상황이다. 옆 사람의 존재가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니 표면적으로는 여름철의 감방인데, 근원적으로는 겨울철의 감방이다. 마음속으로는 옆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언제 없어질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제 역할은 최대한 고립되어 있는 분들을 찾아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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