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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사

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언급한 독립운동가 6인은 누구?

등록 2017-08-15 15:03수정 2017-08-16 09:28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며 독립운동가 6명의 이름을 직접 호명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18일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도 ‘스물아홉살 전남대생 박관현, 스물다섯살 노동자 표정두, 스물네살 서울대생 조성만, 스물다섯살 숭실대생 박래전’의 이름을 불렀다.

문 대통령은 “의열단원이며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 이태준 선생, 간도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선생,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과학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과학자 김용관 선생, 독립군 결사대 단원이었던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며 독립운동가 다섯 명의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이어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 ‘임청각’을 소개한 뒤 이상룡 선생의 자손들이 해방 후 한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했던 사실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며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호명한 이태준·장덕준·남자현·김용관·나운규·이상룡 선생 등 여섯 명의 독립운동가는 누구일까.

1. 의열단원이며 몽골에 근대의술을 보급한 의사 이태준 선생

이태준 선생.  이태준 선생 기념사업회
이태준 선생. 이태준 선생 기념사업회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여운형은 그의 저서 <몽고사막 여행기>에서 몽골 고륜의 한 구릉에 위치한 이태준의 묘를 방문한 뒤 애도의 문장을 남겼다. 의열단원으로써 독립운동에 기여하고, 몽골의 혁명운동에도 참여한 이태준 선생은 한국근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883년 11월21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는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을 거쳐 몽골의 고륜에 자리잡은 그는 근대의술을 몽골사회에 보급하면서 현지인들과 신뢰를 쌓았다. 이태준은 당시 몽골 사람들이 많이 감염됐던 ‘화류병(성병)’ 치료·예방에 힘썼고, 몽골국왕으로부터 국가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오늘날까지 한·몽 교류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김원봉을 만나 뒤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 운반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이태준은 몽골을 침범해 무자비한 폭력통치를 실시한 러시아 백위파부대에 의해 38살의 나이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2. 간도참변 취재 중 실종된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 선생

장덕준 선생. 국가보훈처
장덕준 선생. 국가보훈처

‘동포로서는 차마 보지 못할 비극을 목도하게 되어 피 많은 그로서는 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밤이면 그들과 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였더랍니다…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에 낯모를 일본 사람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는 영영 소식이 잦아지고 말았었답니다.’(<동아일보> 1925년 8월30일)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창간한 장덕준은 대한민국 최초의 순직기자로 기록돼 있다. 동아일보가 정간 조처를 받아 신문을 발행할 수 없던 1920년, 중국 만주의 훈춘(琿瑃)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000명을 무자비하게 죽인 것이었다. 장덕준은 기사를 쓸 지면도 없었지만 취재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장덕준이 일본군에 의해 암살됐다고 보도했다. 그의 나이 29살이었다.

3.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선생

남자현 선생.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 제공
남자현 선생.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위 제공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꼽혀 주목을 받았던 남자현은 1872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19살에 김영주에게 시집을 가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일제의 만행이 극에 이르자 김영주는 1896년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남자현은 남편의 복수를 결심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자현은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 북만주를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세웠고, 10여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계몽에도 힘썼다. 항일운동 중 병들고 상처받은 청년들에게 남자현은 항상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고 기록돼 있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본의 침략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이 돌았다.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일제의 만행을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마디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고 쓴 혈서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다. 193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힌 남자현은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로 사경을 헤매다 석방됐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남자현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4. 과학으로 민족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과학자 김용관 선생

김용관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김용관 선생. 국가보훈처 제공
김용관은 과학을 생활화하고 공업지식을 보급해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인들의 생활이 외국 상품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외국자본은 부유해지고 조선인은 가난해지는 현실을 <동아일보> 연재글을 통해 지적했다.

김용관은 1934년 찰스 다윈의 서거 50주기 기념일인 4월19일을 ‘과학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이런 김용관의 행보는 지속되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판단한 일본 경찰은 1937년부터 과학의 날 행사를 제지했고, 1938년 김용관을 체포했다. 1942년 석방된 그는 만주 등지를 떠돌다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5. 독립군 결사대 단원이었던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

나운규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나운규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독립군 양성기지였던 간도 명동중학에서 수학한 나운규는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쫓기게 됐다. 그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해 ‘공부를 하면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듣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했지만 도판부 활동전력이 드러나 보안법 위반으로 2년간 복역했다.

1923년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나운규는 본격적으로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제작해 <단성사>에서 개봉한 ‘아리랑’으로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일제강점기 동안 전국에서 상영됐던 아리랑은 1942년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훗카이도 탄광에서도 상영돼 조선인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동시대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경손은 나운규의 아리랑에 대해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고 묘사했다.

6.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이상룡 선생

이상룡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이상룡 선생. 한겨레 자료사진
50살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결심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기여한 이상룡은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이상룡은 당시 다양했던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일관되게 산업교육우선론과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다. 그는 당시 여러 분파로 갈린 독립운동 계열의 통합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이상룡 선생의 생가였던 경북 안동의 ‘임청각’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였다”며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다”며 “아흔 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경북 안동 임청각.       한겨레 독자 제공
경북 안동 임청각. 한겨레 독자 제공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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