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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현장에서] ‘산재 은폐' 처벌 받아도…범죄 내용 아무도 모른다

등록 2021-12-31 15:15수정 2021-12-31 15:28

한겨레 자료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지난 29일 고용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재해 예방 의무 위반 사업장 1243개 명단을 자료로 냈길래 각 기업들이 어떤 혐의로 기소됐고 형량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 기업 이름만 줄줄이 나열된 기사가 독자 마음에 남을 리 없다는 생각에, 산재 은폐로 벌금형을 받은 울산의 한 기업을 꼽아 구체적인 범죄 사실을 기사에 녹이려 했다.

한두 번 통화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취재는 하루가 다 가도록 끝이 안 났다. 이미 형이 확정된 기업인데도 사건을 수사한 지방노동청은 ‘수사 내용을 이야기할 수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사건의 재판 고유 번호(사건 번호)도 “따로 파악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다수 지방노동청 근로감독관들은 자신이 수사한 사건이 추후에 법원에서 어떤 판결을 받는지 추적하지 않는데, 울산지청도 예외가 아니었다.

울산에 사는 산재 활동가들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내용을 아는 이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사건 번호를 구했으나 대부분의 경미한 산재 사건이 그렇듯 약식 기소 사건이어서 결정문이 온라인으로 제공되지 않았다. 울산에 사는 법률가에게 판결문 열람을 부탁하려니 법원 휴정기였다. 자료 요구를 위해 국회의원실을 두드리니 ‘회신 오는 데 며칠 걸릴 테고 자료를 받을 지도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이 기업에 대해선 한 건의 언론 보도가 있었다. 누가 어떻게 다쳤는지 흔적도 없는 다른 산재 은폐 기업보다 상황이 나았다. 보도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고용노동부 본부에 다시 질의한 끝에 이 기업에 손가락 골절을 당한 노동자가 있었던 것, 회사가 산재를 신청하지 않고 공상 처리(업무수행 중 부상 당했을 때 산재법 보상을 받지 않고 사용자가 노동자 요양보상에 합의)한 것, 회사 이름으로 치료비를 부담해 병원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한 것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업은 삼성에스디아이(SDI)의 자회사 에스티엠(STM)이다.

취재 과정에서 “한참 지나간 일을 왜 다시 묻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고용노동부 지방노동청과 본부, 에스티엠 홍보 담당자가 물었다. 그러나 에스티엠은 사건 당시 은폐 혐의를 부인했고 후속 기사는 없었다. 에스티엠 소속 노동자는 회사가 어떤 식으로 산재를 숨기려 했고 어떻게 법정에서 결론 났는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지금도 모를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지나간 일’이 아닌 셈이다.

산안법 위반 사업장 공표 제도의 도입 취지는 “사업주의 명예·신용에 심리적 압박을 줘 법 의무 이행을 간접적으로 강제”(2002년 환경노동위원회 산안법 개정안 심사보고서)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부조차도 산재를 은폐하거나 보고를 미룬 기업의 잘못을 사회적으로 드러내기 꺼려 한다. 정부가 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혹은 산재가 널리 알려질수록 담당 공무원이 곤혹스러워질까봐 몸을 사린다는 현장의 ‘의심’이 부디 기우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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