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 화물차 노동자 이호신씨가 4일 간격으로 54만8100원 주유를 한 내역. 이씨는 기름값으로만 50%가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이호신씨 제공
매일 새벽 3시 반, 이아무개(49)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루를 시작한다. 이씨는 10톤짜리 사료 화물차를 7년째 몰고 있다. 전북 정읍에서 경북 김천, 경남 산천 등 장거리 운행을 많이 하는 이씨는 하루 1000km를 운전하는 날도 있다. 왕복 390km 거리를 두차례 왕복하고, 근거리를 ‘몇 탕’ 더 뛰는 식이다. 〈한겨레〉가 입수한 이씨의 4월20일∼5월31일 근무기록을 보면, 이씨는 하루 평균 16시간9분을 일했다. 5월17일부터 4일 동안은 연속으로 새벽 2시30분 출근했다.
20대 초반부터 화물일을 해 온 이씨는 회사 화물차를 몰다가 7년전쯤 ‘조금 더 먹고 살려고’ 개인 화물차를 구매해 곡물 트레일러 일에 뛰어들었다. 6700만원을 주고 중고차를 구매했는데, 매달 차 할부금뿐 아니라 잦은 고장에 따른 부대비용이 많이 들었다. 두 달 간 수리비만 1500만원이 찍히는 걸 견디지 못해 지난 9월 새 차를 구매했다.
또 다시 굴레의 시작이다. 월 평균 1400만원이 총 운임비용으로 들어와도, ‘허상’이다. 차 할부비용이 매달 265만원이다. 기름값이 700만원 가까이 나온다. 타이어와 엔진오일 등 소모품 비용만 월 100만원은 훌쩍 넘는다. 실제로 이씨가 손에 쥐는 돈은 매달 3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수입이 안 나오니, 늘 움직여야만 한다. 평균 오전 3시42분 출근, 저녁 7시51분 퇴근. 하루종일 일하는 이씨의 통장을 스쳐간 1400만원은 신기루 같다.
사료차 13대 근무표…“하루 14시간씩 일해도 남는 게 없다”
<한겨레>가 전북 한 사료 회사 소속 화물연대 조합원 13명의 근무표를 분석하고 인터뷰를 종합한 결과, 대다수 곡물·사료 화물차 노동자들의 사정은 비슷했다.
4월20일부터 5월31일까지 이들 조합원 13명의 출퇴근 기록을 보면, 평균 근무 시간은 14시간이 넘었다. 이 중 8명의 최근 5개월(6월∼10월)간 차량 운행 데이터를 보면 대기 시간이나 상·하차 시간을 제외하고 운전대를 잡은 시간만 11시간이 넘는다. 14년째 곡물 화물차를 몰고 있는 주아무개(47)씨의 6∼10월 주행 기록 및 위험운전 통계를 보면, 126일 중 31일 이상 위험 운전 행동 수준이 ‘매우위험’으로 나와있다. 단돈 몇 천원이라도 더 남기려고 과적하고, 욕 안 먹고 운송을 마치기 위해 과속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화물연대는 기존 시멘트·컨테이너 이외에 곡물사료 등 5개 품목도 안전운임제를 적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이들이 고소득 노동자이기 때문에 안전운임제 적용이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기준 보수액 및 평균임금 등 산정을 위한 소득수준 실태조사’ 자료를 근거로, 곡물운반 기사 평균 순소득이 525만원이라고 추산한다. 하지만 해당 자료는 할부금, 차량 정비비, 유지비, 소모품비 등이 누락돼있고, 지난 3월부터 폭등한 유류비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한정희(47)씨는 지난 5월6일 군산, 곡성, 장흥을 다니며 11시간19분 동안 470km를 운전했지만, 이날이 ‘돈 못 번 날’이라고 말했다. 군산 농장은 매번 3톤씩, 곡성도 10톤 이하를 주문하는 곳이다. 한씨는 “장거리 뛸 때도 6톤 가지고 가면 뭐가 남겠어요. 최소 운행 톤수를 보장해주거나, 적어도 9톤을 기준으로 운임을 지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씨 역시 “6톤 싣고 장거리로 180km 뛰면 운임비 21만원 줘요. 근데 왕복 360km면 기름이 100L니까 18만원에 톨게이트비 2만∼3만원 써야죠. 그러면 고작 정부에서 주는 유류 보조금이 남는다”고 설명했다.
한정희씨의 주행기록이 표기된 구글타임라인 어플 화면.
화물연대가 지난 7월 조합원 2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전운임 확대를 위한 조합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곡물·사료 분야 화물 노동자는 한 달에 26일가량 일하고 월 매출은 1228만원이다. 매일 평균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며, 일주일로 환산하면 평균 92시간 근무다. 월 366시간을 일하고 409만원을 버는 곡물·사료 화물차 기사들의 시간당 운임은 1만1172원이다.
화물 노동자들은 적은 운임으로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해서 남들 버는 만큼 번다. 이씨가 명절을 포기한 지는 10년이 넘었고, 좋아하던 배드민턴이나 볼링 등 운동도 끊은지 오래다. ‘떠나면 그만 아닌가’도 속 편한 얘기다. 보통 차량 구매 빚을 내 시작하는 일이다 보니, 일을 몇 년 하지도 않고 떠나면 손해를 본다. 들어오는 건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
한국교통연구원의 ‘화물차 안전운임제 성과분석 및 활성화 방안 연구’를 보면 안전운임제가 도입된 컨테이너 품목과 시멘트 품목은 각각 수입이 24.3%, 110.9% 올랐다.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자 수 역시 2020년도 기준 전년도에 비해 8.9% 감소했다. 곡물·화물 노동자의 유일한 희망이 안전운임제 도입인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구조를 바꿀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서, 그나마 있는 안전운임제마저 안전에 미치는 영향이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시멘트 분야에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하며 “정부는 조직화되지 못한 산업 현장의 진정한 약자들을 더욱 잘 챙길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씨를 비롯한 화물 노동자는 묻는다. ‘진정한 약자’가 되려면 화물노동자의 하루는 얼마나 더 쉼이 없어야 하느냐고.
장현은 기자
mi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