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23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 사고와 관련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시험 답안지 600여건이 채점도 하기 전에 통째로 파쇄되는 황당한 사고가 발생했다. 시험을 주관한 한국산업인력공단이 해당 응시자에 추가 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지만, 피해 수험자들의 줄소송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지난달 23일 서울 연서중학교에서 시행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필답형 답안지 609건이 채점하기도 전에 파쇄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날 전국에서 시험을 치른 응시자는 500여개 과목에 걸쳐 15만1797명이다. 이 중 연서중에서 시험을 치른 전기기사, 전기산업기사, 소방설비기사, 소방설비산업기사, 토목기사, 건축기사 등 61개 과목에 응시한 609명의 답안지가 파쇄된 것이다.
산업인력공단이 밝힌 사고 경위를 보면, 지난달 23일 시험이 끝난 직후 연서중을 포함한 서울 시내 18개 답안지 포대가 공단 서울서부지사로 운반됐다. 운반된 답안지 포대들은 모두 지사 내 금고에 보관된 뒤 이튿날 공단본부(채점센터)로 인수·인계된다. 그런데 이때 연서중의 답안지 포대만 금고에 옮겨지지 않았고, 결국 공단본부로도 이송되지 못했다. 연서중 답안지는 직원의 실수로 금고 옆에 있는 창고로 옮겨진 뒤 남은 문제지 등을 파쇄할 때 함께 처리됐다.
공단은 시험을 치른 지 한 달이나 지난 20일에야 해당 답안지가 사라진 사실을 인지했다. 어수봉 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자격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담보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점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 이사장은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배경에 대해 “채점이 즉시 시행되는 게 아니다. 국가자격시험이 매우 많기 때문에 그 일정에 따라 채점이 진행된다. (해당 시험의) 채점이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단은 피해 수험자를 대상으로 다음달 1∼4일 추가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 기간에 시험을 치른 수험자는 당초 예정된 실기시험 합격자 발표일(6월9일)에 시험 결과를 받아볼 수 있도록 조치할 계획이다. 또 해당 날짜에 응시가 어려운 수험자는 6월24∼25일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는 27일 하기로 했다. 이들 중 재시험을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수료를 전액 환불한다.
공단은 피해 수험자 609명에게 교통비 등을 지원하는 등 추가 보상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또 재발 방지를 위해 관련자를 문책하고 자격검정 시스템을 재점검할 계획이다.
그러나 공단을 상대로 한 피해 수험자의 줄소송은 불가피해 보인다. 정구성 법률사무소 제이씨앤파트너스 변호사는 “시험 시행기관은 응시자들에게 공정한 절차를 통해 시험을 보게 하고 합격 여부를 판정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런데 채점을 하지 않은 시험지를 파쇄한 것은 이러한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서 배상 또는 보상 의무가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해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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