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이 1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근로시간 관련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와 향후 정책 추진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제공.
정부가 ‘주 69시간(주 6일 근무 기준)’ 논란 뒤 8개월 만에 “주 52시간제의 틀을 유지하되 특정 업종·직종의 연장근로를 유연화한다”는 정책 방향을 13일 밝혔다. 지난 3월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정부가 앞으론 ‘사회적 대화’를 거쳐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장시간 노동 논란을 잠재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가 이날 정책 방향의 근거로 삼은 ‘대국민 설문조사’의 설계와 해석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제기되는데다, 여전히 업종과 직종별로 연장근로 유연화를 추진하겠다는 정부 기조가 유지된 탓이다.
우선 정부는 이날 일부 업종·직종의 연장근로시간을 유연화해야 한다는 근거로 “연장근로 관리단위 확대에 대한 동의 비율이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로 나타났다”며 설문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첨예한 논쟁 지점이 될 수 있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며 설문조사를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해당 질문은 연장근로 유연화 때 △근로자 동의 △연장근로시간 주 평균 12시간 이하 △주 최대 근로시간 제한 △휴식권 부여 등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황을 전제로 삼았다. 김종진 유니온센터 이사장은 “지난 3월 발표 당시에도 현실의 일터에서는 연장근로에 따른 정당한 보상과 휴식이 주어지지 않아 문제가 됐는데,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물어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해석에서도 정부와 노동계의 입장이 엇갈렸다. 노동계는 질문이 ‘연장근로 유연화 동의’를 선택하기 쉬운 구조로 짜였음에도 응답자 대부분이 현재 주 40시간 노동과 주 최대 12시간의 연장근로 제한을 지지한 대목에 집중했다. 가령 ‘추가 소득을 위해 연장근로 의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노동자 답변은 ‘아니요’가 절반을 넘겼다(58.3%). 연장근로의 가장 커다란 유인인 수당 등 ‘추가 소득’을 전제로 물었는데도 ‘주 40시간 노동’에 대한 응답자들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 사업주 85.5%는 ‘최근 6개월간 현행 근로시간 규정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직장갑질119의 박성우 노무사는 “‘(주 최대 52시간제가) 지나치게 경직된 제도로 급격하게 도입돼 현장의 충격이 크다’는 것이 정부가 무리하게 연장근로 유연화를 추진한 이유였는데 이런 주장이 허구였음을 드러내는 결과”로 풀이했다. 반면 정부는 이 수치는 업종별로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제조업 등의 100~300인 이상 규모 사업장에서는 이 응답이 30~40%로 크게 높아져, 일부 업종이나 중소기업에선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부가 설문조사를 근거로 연장근로 단위 개편이 필요한 업종으로 꼽은 제조업, 건설업 등에 대해서도 신중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설문 응답자들이 연장근로 단위 확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업종(복수선택)으로 제조업(55.3%), 건설업(28.7%)을 꼽은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들 업종은 주로 시간급 체계이다 보니, 일을 많이 할수록 임금이 많아지는 구조다. 정기호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임금 보전 탓에 응답률이 높은 산업을 두고 연장근로를 유연화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은 임금을 미끼로 건강권을 해치는 장시간 노동에 노동자를 내모는 결과를 낳는 만큼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심층면접조사(FGI)를 보면 “돈이 일단 급하기 때문에 (연장근로 단위 개편에) 찬성할 것 같다”는 응답과, 그럼에도 “64시간 일할 때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52시간을 채우는 직원들도 피로를 호소한다”는 응답이 나란히 나왔다. 근로시간과 연동된 임금 탓에 장시간 일하지만 장시간 노동이 건강에 주는 부담을 우려하는 모습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연장근로 유연화라는 중요한 제도 개편 근거를 설문조사에서 찾는 것은 굉장히 무리한 방법”이라며 “현재 존재하는 유연근무제도와 연장근로 유연화의 관계 등 전문가도 알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노동시간 제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데, 설문조사는 이런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김해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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