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바람이 훅 불었다. “바람이 몸을 빙 도는가” 싶은 순간, 여든두살의 노구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지난 4월의 일이다. 달포를 병원에서 보냈다. 자식들은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는 어머니가 불안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나 하나 죽으면 조그만 구멍이 하나 생길 거예요. 노동자와 학생이 모여 데모하고 소리를 치면, 그 구멍이 조금씩 넓어지면,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야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지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꼭 약속해줘요.”
40년 전 그 추웠던 11월13일 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마지막 약속을 재촉하는 전태일에게 “내 몸이 가루가 돼도 네가 부탁한 걸 하겠다”던 어미의 약속은 이소선씨의 운명이 돼버렸다.
그날 이후, 이씨는 아들 친구들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만들고 전국의 노동쟁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의 단결, 노동자와 학생의 단결을 외쳤다. 중앙정보부의 회유도, 경찰의 몽둥이질도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투사’로 거듭났다.
10월22일 서울 창신동의 2층 전셋집에서 만난 이씨는 “어떻게 산 줄도 모르게 40년이 금방 지나갔다”고 말했다. “민주노조 깃발 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라고 노래부르던 노동자들의 소망이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건설로 현실화한 게 가장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15년이 흘렀다. 태일이가 정녕 원하던, 노동자가 기계 아닌 사람대접 받는 세상은 가까워졌을까? 이씨는 “40년 동안 그러고 다녀도 (노동자 세상은) 잘 안되더라. 태일이를 다시 만나면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야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 아직 갈 길은 멀다. 이 시대 노동자의 삶은 “자살하는 놈도 많고 배고픈 놈도 많은데, 소문만 안 날 뿐”이고, 현 정부 들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경제를) 누가 이만큼 성장시켰는데…. 먹물이 했어? 정치인이 했어? 노동자가 뼈 녹여서 했지. 그런데 노동자를 물건 취급해서 비정규직으로 몰아넣으니까, 어휴~. 민주노총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하나로 모아내는 힘을 내지 못해.” 나지막이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