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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10살에야 들어간 미인가 국민학교 / 이총각

등록 2013-05-21 19:39수정 2013-05-21 21:13

이총각은 10살에야 초등학교에 들어가 겨우 졸업했으나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는 1년도 채 못 다녔다. 하지만 인천 만수동 빈민촌 시절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공동화장실이었다. 사진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재현해놓은 인근 송현동의 공동화장실 모습.
이총각은 10살에야 초등학교에 들어가 겨우 졸업했으나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는 1년도 채 못 다녔다. 하지만 인천 만수동 빈민촌 시절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공동화장실이었다. 사진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재현해놓은 인근 송현동의 공동화장실 모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
1956년 봄, 이총각은 10살이 되어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허름한 일본 적산가옥 2층에 있었던 ‘근화국민학교’는 인가도 받지 않은 학원 같은 곳이었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총각’이라는 이름이 창피해 ‘유여’라고 했다. 언니 이름 ‘유자’에서 따서 지은 것이었다.

사실 또래들이 책가방을 등에 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총각은 그 줄에 끼고 싶어, 어머니한테 욕을 늘어지게 먹으면서도 조르고 또 졸랐다. 그 와중에 여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나 입이 늘고 보니 마냥 고집을 세운다고 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국 어머니가 총각에게 져준 건, 졸업은 못하더라도 학교 구경은 시켜주자는 생각이었을 게다.

그사이 형편이 아주 살짝 나아져 졸업까지는 했지만, 총각은 입학한 첫해부터 월사금을 제때 못 내서 낭패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월사금을 안 가져왔다고 벌도 서고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는데,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어서 그냥 혼자 놀다가 수업이 끝난 뒤에야 책보를 싸들고 나오곤 했다. 한번은 담임선생이 ‘도대체 부모님이 뭘 하시냐’고 물어서 석탄을 파신다고 하니, 그거라도 가져오라고 하여 석탄으로 월사금을 대신 내기도 했다.

그래도 어린 총각은 그저 즐거웠다. 변변한 책가방도 없어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허리춤에 질끈 묶고는, 걷는 것도 답답해 늘 뛰어다녔다. 동네 친구들 형편도 고만고만해서 가난 때문에 더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노는 것도 마치 선머슴처럼 ‘말뚝박기’ 같은 거친 놀이를 즐겨 했다. 여동생 ‘똘똘이’가 혼자 집에 있기 싫다며 울고불고해서 같이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날은, 그 먼 길을 동생을 업고 가서 교실 뒤편에 앉혀두고 수업을 받았을 정도였지만 썩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수업 중에 몰래 도시락을 까먹는 것도 별미였다. 반찬이래야 겨우 단무지 정도였는데도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도저히 점심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바닷가라 생선이 흔했기 때문에 어떤 날은 어묵을 도시락에 넣어 갈 때도 있었는데 최고의 반찬이었다.

총각이 4학년쯤 됐을 때 동일방직에 취직한 큰언니는 월급을 봉투째 살림에 보탰지만 쥐꼬리만해서 여섯 식구가 먹고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조선기계에서 임시공으로 1~2년 일했던 아버지는 이후로 줄곧 노름 아니면 술로 하루를 보냈다. 그나마 어머니는 포대 자루 가득 석탄을 지고 다니며 여관이나 목욕탕에 팔고, 가끔 화물선이 들어오면 배에 올라 밀가루며 쌀 등을 포대에 담는 일을 하러 다니곤 했다. 가끔 밀가루라도 얻어 오면 이북 사투리로 ‘뜨덕집’, 인천에서는 ‘대갈범벅’이라고 부르던 별식을 해주었다. 굵은 팥을 푹 삶아 밑에 깔고 밀가루로 수제비를 떠서 켜켜이 놓고 찌는 일종의 떡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제일 끔찍했던 건 공동화장실이었다. 늘 긴 줄 끝에 서서 동동거려야 겨우 내 차지가 되었던 화장실은 겨울이면 똥오줌이 꽁꽁 얼어붙어 엉덩이에 닿을 지경이었다. 여름이면 흘러넘쳐 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했다. 200가구에 겨우 하나 있는 우물도 골치였다. 한밤중까지 줄이 길어 서로 먼저 떠가겠다고 법석이었다. 그러다가 두레박 줄들이라도 엉키면 악다구니를 쓰며 화풀이들을 해댔다. 김장을 할 때는 시장 바닥에서 시래기를 주워 와 가까운 바닷가에 나가 짠물에 헹궈 간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만석동에서 수도가 있는 송월동까지 친구들과 떼지어 걸어가서 초롱에 물을 길어 오기도 했다.

너나없이 가난하고 힘들었던 때였고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허락됐던 참으로 시난고난한 시절이었다. 무허가 천막집이라 하루아침에 철거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른들은 모두 일나가고 동생들을 돌보다 낯선 장정들이 몰려와 집을 박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떤 적도 있다. 이후 이사한 ‘만석동 9번지’ 하꼬방 같은 집은 베니어판으로 구분해놓은 옆집에서 말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지만, 흙담으로 지은 덕분에 튼튼하기는 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무인가였던 근화국민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총각은 6학년 무렵 자유공원 밑에 있는 무궁화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어찌어찌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도 진학을 했다. 하지만 겨우 한 학기를 가다 말다 하다 말았다. 언니의 월급과 어머니의 품삯이 전부인 형편에 공부는 사치였다. 그런 식으로는 더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총각은 남동생만큼은 꼭 공부를 시켜서 훌륭하게 키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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