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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본조 수습위원의 기만과 지부장의 퇴사 / 이총각

등록 2013-06-30 19:27

1976년 말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중앙정보부와 회사 쪽으로부터 끊임없이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던 이영숙 지부장이 돌연 잠적하더니 퇴사와 함께 결혼하자 충격에 빠졌다. 사진은 75년 초가을 이영숙 지부장(맨 오른쪽)과 이총각(오른쪽 둘째)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이 이후 겪게 될 파란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코스모스 꽃밭에서 즐거워하던 순간이다.
1976년 말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중앙정보부와 회사 쪽으로부터 끊임없이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던 이영숙 지부장이 돌연 잠적하더니 퇴사와 함께 결혼하자 충격에 빠졌다. 사진은 75년 초가을 이영숙 지부장(맨 오른쪽)과 이총각(오른쪽 둘째)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이 이후 겪게 될 파란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코스모스 꽃밭에서 즐거워하던 순간이다.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32
1976년 11월2일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영숙 지부장은 ‘사고 지부’로 처리해 사태를 수습해줄 것을 섬유노조본부(본조)에 요청했다. 그러자 본조에서 이풍우 기획실장이 수습 책임위원으로 내려왔다. 이영숙 집행부는 모든 게 제대로 진행될 거라는 기대에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황은 조합원들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풍우가 오고 불과 한달 뒤인 12월25일 회사와 이풍우 사이에 비밀리에 이뤄진 단체협약 갱신 공문이 경기도지사의 승인을 거쳐 노조로 발송되었다. 반장까지만 허용해온 노조 가입 자격을 노조 탄압에 가담했던 사원에게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본조에서 내려온 수습위원이란 자가 회사와 짜고 조합원을 기만한 것이었다. 사전에 그런 식의 단체협상 갱신안이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했던 이영숙과 이총각은 섬유본조에 찾아가 사원의 노조 가입은 절대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본조에서는 이미 결정해놓고도 교섭이 진행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집행부와 조합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드디어 불법적으로 조직 찬탈을 자행한 반조직파를 단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고두영파가 문제가 아니라 노조 자체가 회사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정한 수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집행부는 “섬유노조는 근로자의 아픔을 대변하라”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다른 노조들과 사회단체에 배포했다. 이렇게 섬유본조와 동일방직 지부는 회복 불가능한 대립관계로 돌아서고 말았다.

‘알몸시위’를 통해 조합원들의 열성적인 투쟁의식을 심각하게 감지한 회사는 조합원 개개인을 회유·협박해 퇴사시키고, 섬유본조와 공조해서 노조 자체를 깨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다녀간 뒤로 이 지부장에 대한 회유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풍우가 내려올 무렵 이 지부장에게 노조를 그만두면 본사 사원으로 승진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사실도 나중에 밝혀졌다.

반면 이총각에게는 아예 씨알도 안 먹힐 거라고 판단을 했는지 그런 황당한 회유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지부장은 약혼자가 군인 신분이라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총각은 그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번은 그냥 결혼이나 하고 퇴사했으면 좋겠다는 푸념도 했다. 깜짝 놀란 총각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너만 혼자 살자고 나갈 수가 있느냐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거짓말처럼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 지부장이 퇴사했다는 소식을 물고 왔다. 모두들 믿어지지가 않아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고 총각은 말문이 막혔다. 목숨을 걸고 민주노조를 만들어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함께 키우고 지켜온 동지인데 어떻게 자기 혼자만 편한 길을 선택해 나갈 수가 있을까? 게다가 끝도 없는 회사 쪽의 노조파괴 책동에 지칠 대로 지친 조합원들을 두고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지부장이 퇴사하고 곧 결혼할 거라는 소식에 지도자를 잃은 조합원들의 허탈감은 바로 분노로 바뀌었다. 모두들 그의 결혼식장으로 몰려가 배신자에게 쓴맛을 보여주자며 울분을 토해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총각은 무엇보다 지부장인 그가 어떤 절차도 밟지 않고 불시에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어느 누구도 그의 결혼 소식을 개인적으로 통보받은 사람은 없었다. 피눈물을 같이 나눈 동지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총각은 문득 늘 이영숙을 믿고 중심에 세워주었던 조화순 목사가 생각나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화풀이하듯 “목사님이 그리도 예뻐하신 이영숙이 회사를 나갔대요. 목사님한테는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 하고는 큰소리로 울어버렸다. 묵묵부답이던 조 목사도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누구한테든 패악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조 목사도 이영숙으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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