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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운명의 날…급기야 터진 ‘똥물사건’ / 이총각

등록 2013-07-17 19:45수정 2013-07-17 21:00

1978년 2월21일 새벽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고자 회사 쪽과 반대파 남자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똥물을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작업 현장에 있던 여성 조합원들은 일제히 노조로 모여들었다. 사진은 앞서 77년 4월 대의원대회 때 반대파들의 행패를 막고자 여성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뛰쳐나오는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1978년 2월21일 새벽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고자 회사 쪽과 반대파 남자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에 똥물을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작업 현장에 있던 여성 조합원들은 일제히 노조로 모여들었다. 사진은 앞서 77년 4월 대의원대회 때 반대파들의 행패를 막고자 여성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뛰쳐나오는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5
동일방직 민주노조 대의원 선거를 하루 앞둔 1978년 2월20일 이총각은 초조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숱한 시련을 견디고 극복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 모두를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한 일이 빨갱이짓으로 둔갑하고, 힘들어도 함께여서 웃을 수 있었던 동지가 적으로 돌변하여 등에 비수를 꽂아도 정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겪은 많은 일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이젠 그 어떤 비열한 상황이 발생해도 기필코 이겨낼 수 있으리라. 총각이 승리를 확신하는 건 듬직한 조합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꺾이지 않을 용기와 열정으로 그들과 함께 생명과도 같은 노동조합을 지켜나갈 것이었다.

총각과 집행 간부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투표함을 만들며 의지를 다지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박복례와 남자 조합원들을 비롯한 폭력배 여러 명이 노조 사무실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투표함을 때려 부수며 총각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순식간의 일이라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섬유본조 조직국장 우종환과 조직행동대장 맹원구(풍한방직 신탄진지부장) 등은 지켜보고만 있더니 오히려 폭력배들 편에서 행동을 했다. 드디어 더러운 약탈의 판이 벌여진 것이다.

이제 반조직파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되는 상황이라 총각은 경찰에 질서유지를 위한 인원 파견을 요청했다. 다시 4개의 투표함을 만들기 시작한 집행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밤새 사무실을 지키며 결의를 다졌다. 아마도 다음날은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2월21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야근반 조합원들이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새벽 5시 무렵, 새벽 출근조인 직포과 조합원 석정남(<공장의 불빛> 저자)은 밤새 잠을 설치다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나 출근을 서둘렀다. 노조 사무실에 들어서니 밤새 뜬눈으로 버틴 간부들이 몹시 초췌한 모습으로 맞았다. 지부장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돌았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부장님, 어떻게 별일 없이 잘 끝낼 수 있을까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관할서에 지원 요청을 해서 사복 경찰들도 와 있고, 본조에서도 사람이 와 있으니, 우리는 정신무장만 철저히 하고 있으면 돼.”

총각은 정남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남은 지부장의 믿음직한 말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시간에 맞춰 작업 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노조 사무실 옆에 있는 화장실 쪽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둑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찰이나 본조에서 온 간부들이겠거니 싶어서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야근조들이 벌써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업복을 입은 채 4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투표장인 노조 사무실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긴 행렬은 중앙복도를 가득 메웠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에 울컥하는 감동마저 느껴졌다.

걱정이 한가득이었던 마음이 말끔히 씻긴 정남은 뿌듯한 심정으로 행렬이 다 나갈 때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현장 담임의 핀잔 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벅찬 감정이 잦아들지 않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렇게 조합원들이 단결해 선거를 치른다면 승리는 불을 보듯 훤한 것이었다. 직포과의 대의원으로 출마한 친구 최연봉과 호숙이도 충분히 반대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니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바로 그때 와인다 부서에서 일하는 한 조합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남아, 어떡하면 좋으니? 어떡해!” “왜? 무슨 일이야?” “빨리 노조 사무실에 가봐. 문명순과 남자 새끼들이 똥을 뿌리고 난리 났어.”

순간 정남은 온몸이 덜덜 떨리며 주저앉을 것 같았다. 결국 천인공노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근무 중 무단이탈로 해고하겠다!”는 담임의 말을 뒤로한 채 그는 노조 사무실로 달려갔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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