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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진 않았다” / 이총각

등록 2013-07-18 19:31수정 2013-07-22 13:57

1978년 2월21일 새벽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고자 회사 쪽의 사주를 받은 반조직파 남자 조합원들은 노조 사무실과 여성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무자비하게 투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진은 당시 노조 사무실 바닥에 뿌려진 똥물을 치우는 모습으로, 이총각의 부탁을 받은 인근 우일사진관 주인 이기복이 찍은 것이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사> 중에서
1978년 2월21일 새벽 동일방직 민주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방해하고자 회사 쪽의 사주를 받은 반조직파 남자 조합원들은 노조 사무실과 여성 조합원들에게 똥물을 무자비하게 투척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진은 당시 노조 사무실 바닥에 뿌려진 똥물을 치우는 모습으로, 이총각의 부탁을 받은 인근 우일사진관 주인 이기복이 찍은 것이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사>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6
1978년 2월21일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처절한 통곡소리가 새벽 찬 공기를 갈랐다. 문명순·박복례를 앞세운 반조직파 남자 조합원들은 회사의 지원을 등에 업고 기어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조합원들을 기다리며 정성스레 만든 대의원 선거 투표함은 똥물을 뒤집어쓴 채 박살이 났고, 노조 사무실에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은 가죽장갑을 끼고 방화수통에 담아온 똥을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마구 뿌려댔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은 박복례와 문명순이 고함을 지르며 “저년에게 먹여라!” 하고 남자 조합원들을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비명밖에 지를 수 없는 이 상황이 이총각은 마치 지옥 같았다.

노조 사무실 밖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투표를 하려고 작업 현장에서 나오고 있는 여성 조합원들에게도 닥치는 대로 얼굴과 온몸에 똥을 바르고 뿌리며 심지어는 코와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기겁해 달아나는 조합원들을 끝까지 쫓아다니며 젖가슴에 똥을 집어넣는가 하면 아예 통째로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피해 달아날 곳조차 없었다. 그들은 탈의실과 기숙사까지도 쫓아 들어와 똥을 뿌려 댔다.

그런데 이 참혹한 광경을 그냥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조의 요청에 따라 파견 나온 사복경찰들과 담당 김건일과 유치관 형사, 그리고 섬유노조본부(섬유본조)에서 나온 간부들과 행동대원들이었다. 조합원들은 너무나 절박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욕설뿐이었다.

똥 세례를 받고 난장판이 된 노조 사무실에 박복례와 남자 조합원들이 다시 들어와 투표함과 사무비품들을 때려 부수며 또 한바탕 고래고래 소릴 질러 댔다. “니년들! 어디 투표할 수 있나 두고 보자!”

승리에 도취된 그들이 사라진 노조 사무실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정당한 투표를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상상도 안 했지만, 해봤자 투표함이나 부수고 비품을 깨뜨리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총각은 순간 이 상황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그 시절 노조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회사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진관이 하나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관 이름도 모르겠고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에 부탁을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총각은 서둘러 사진관으로 뛰어갔다. 새벽 어둠이 걷히고 뿌옇게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직 잠에서 깨긴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총각은 앞뒤 가릴 새 없이 사진관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잠시 뒤 인기척이 들리더니 주인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총각은 동일방직 노조 상황을 짧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뜻밖에도 아저씨는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먼저 가 있으면 준비해서 뒤따라가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달려와서 현장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가 사진을 찍어간 것을 알게 된 반조직파에서는 박복례를 사진관에 보내 사진을 내놓으라고 했단다. 하지만 아저씨는 이미 찾아가고 없다며 거짓말로 둘러대고는 총각에게 사진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한국 노동운동 사상 가장 참담한 장면으로 기록된 똥물 사건은 그렇게 증거를 남길 수 있었다.

98년께 총각은 20년 만에 그 사진관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바로 인천시 동구 만석동 9번지 우일사진관, 간판도 주인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제야 이름을 확인한 주인아저씨 이기복은 총각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일들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인 아저씨는 당시 동일방직 노조 여성 노동자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남자 조합원들이 방해를 한다는 사실도 자주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고 했다. 또 박복례 말고도 정보기관에서 찾아와 필름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놨지만 마찬가지로 모두 찾아가 버리고 없다고 잡아뗐단다. 아저씨는 훗날 ‘그때 노조 사무실 현장에서 사진값이라고 똥 묻은 봉투에 돈을 담아 주는데, 차마 그 돈을 못 받겠더라’는 증언도 해주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총각은 노동조합 관계자도 아니고 이른바 운동권도 전혀 아닌 ‘평범한 서민’ 아저씨의 용기에 감동했다. 당시는 너무 험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많이 당하고 사느라 아저씨의 노고에 감사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총각은 뒤늦게나마 아저씨가 동일방직 노조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역사에 큰 기여를 했음을 전하고 두고두고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옳은 일에 묵묵히 돌 하나를 더할 줄 아는 시민 한 사람의 용기만으로도 역사는 희망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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