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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첫 면회 온 어머니는 해맑게 웃었다 / 이총각

등록 2013-08-05 18:34

1978년 5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된 이래 노동운동을 하는 내내 궂은일을 당할 때마다 이총각은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를 통해 인연을 맺은 신부들에게 위로와 힘을 받았다. 사진은 당시 인천교구장을 지낸 미국인 나길모(윌리엄 존 맥노튼) 주교로, 유치장에 있는 총각을 특별면회해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해주었다.
1978년 5월 인천소년교도소에 수감된 이래 노동운동을 하는 내내 궂은일을 당할 때마다 이총각은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를 통해 인연을 맺은 신부들에게 위로와 힘을 받았다. 사진은 당시 인천교구장을 지낸 미국인 나길모(윌리엄 존 맥노튼) 주교로, 유치장에 있는 총각을 특별면회해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해주었다.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58
1978년 5월초 이총각이 인천소년교도소(인천구치소)에 갇히자 어머니가 가장 먼저 달려오셨다. 총각은 어머니를 보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험한 꼴을 보여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해맑게 웃고 계셨다. 어쩌면 무안해서 그랬겠지만 당신 딸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으셨던 것 같다. 훗날 그때 왜 웃으셨냐고 물었더니 “네가 죄지은 게 없으니 울 일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다. 워낙 낙천적이고 강하신 분이라 그럴 만도 했지만 평생을 거의 무직으로 사셨던 아버지 대신 자식들을 거둬 먹이시느라 더욱 단단해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잠자리며 먹는 건 어떤지, 뭐가 필요한지, 뭐가 먹고 싶은지, 당신이 뭘 해줬으면 좋을지를 꼬치꼬치 물으셨다. 어머니는 총각이 출소할 때까지 한달에 두세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가 면회를 올 때는 이경심(세실리아)이 늘 모시고 다니며 마치 딸처럼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었다. 그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무작정 발품을 팔아야 했을 테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돌아가는 정세나 조합원들 이야기도 전해주는 등 세상과의 통로가 돼주었다. 그리고 책(주로 종교 관련 서적)도 많이 넣어주어서 모처럼 독서를 많이 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동생 철하는 처음 한동안 면회를 오지 않았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집안 살림도 조금씩 피기 시작했고, 결혼하기 전 용현동 넓은 집으로 이사도 했다. 총각은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긴 연애를 했던 철하는 결혼식을 올린 뒤 신부와 함께 교도소로 인사를 왔다. 총각은 미안하고 쑥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래도 누나라고 새신부까지 데리고 온 동생이 대견했다. 올케 역시 노동운동을 하는 형님 덕분에 험한 꼴을 많이 당해야 했을 것이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다.

이총각이 궂은일을 당할 때마다 힘이 돼주신 분은 신부님들이었다. 초대 인천교구장이었던 미국인 나길모(윌리엄 존 맥노튼) 주교님은 신자들에 대한 보살핌이 극진해서 유치장에 있을 때부터 특별면회를 해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주고 가셨다. 그리고 답동성당의 김병상 신부님 역시 자주 오셔서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기도할 기운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그저 팔다리 늘어뜨리고 속수무책 힘들기만 할 때 그분들이 내민 손은 총각에게 생명줄이었다.

감옥에서의 여름은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도 답답해 변기통 옆 작은 구멍을 열어두면 냄새와 함께 바람 한 점이나마 느낄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충분한 게 아니어서 총각은 늘 퉁퉁 부어 있었다. 처음 구치소에 들어올 때 파리채를 주는 게 의아했는데, 여름이 되니 그게 왜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벽에는 모기를 잡을 때 튄 핏자국이 낭자했다. 늘 전등이 켜져 있으니 벌레들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모기들의 웽웽거리는 소리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비라도 오는 날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습했고, 마룻바닥 밑에서는 쥐 오줌 냄새인지 지린내가 진동했다. 당시엔 인천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씻지도 못해 너무나 괴로웠다. 무엇보다 독방에 혼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총각이 갇힌 독방 뒤에는 마침 교도관들이 이용하는 식당이 있었다. 어느날 밥때가 아닌데 식구통으로 맛있는 음식이 쑥 들어왔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말소리가 나더니 쓱 지나갔다.

“빨리 먹고 내놔.” 납작한 양은그릇에 고기요리가 들어있었다. 아마도 교도관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넣어준 것 같았다. 총각은 깜짝 놀랐지만 냄새가 너무 좋아서 금방 먹어치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총무인 김인숙과 합방하는 소지(사동 청소를 하는 수감자)가 넣어준 것이었다. 한번도 얼굴 맞대고 말을 해본 적이 없는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호의를 제공해줘 눈물이 났다. 이후로도 살면서 그렇게 꿀맛 같은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번 두번 계속 이어지자 이제는 총각 쪽에서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서글프기도 했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온정이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2013년 7월29일 새벽 5시 반 어머니가 세상을 달리하셨다. 아흔한살, 노동운동 하는 셋째딸 때문에 짧지 않은 세월 마음을 졸이며 사셨을 것을 생각하면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었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 4년을 총각과 함께 사셨으니 셋째딸 걱정은 다 놓고 가셨을 것이다. 총각은 김병상 몬시뇰을 비롯한 여섯 분의 신부들이 오셔서 장례미사를 올려드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고 애써 위안을 삼는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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