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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김인태 때리다 해고자들은 끝내 울음을… / 이총각

등록 2013-08-13 19:10수정 2013-08-13 21:05

1978년 7월 김영태 섬유산업노조 위원장의 재선을 막고자 부산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의원대회에 참가하려다 실패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해운대에서 민주노조 탄압에 앞장섰던 반대파 박복례·김인태·정봉용 등을 만나 한바탕 충돌을 빚었다. 사진은 앞서 77년 3월 노조 수습 대의원대회 진행을 방해하고 있는 김인태의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1978년 7월 김영태 섬유산업노조 위원장의 재선을 막고자 부산에서 열린 임시 전국대의원대회에 참가하려다 실패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해운대에서 민주노조 탄압에 앞장섰던 반대파 박복례·김인태·정봉용 등을 만나 한바탕 충돌을 빚었다. 사진은 앞서 77년 3월 노조 수습 대의원대회 진행을 방해하고 있는 김인태의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4
1978년 7월 김영태의 섬유산업노조(섬유본조) 위원장 재선을 저지하지 못한 억울함에 밤새 못 마시는 술을 퍼부은 동일 해고자들은 이튿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방용석 원풍모방 지부장은 그들에게 목욕도 하고 마음도 가라앉힐 겸 태종대 구경이라도 하고 오라며 돈까지 쥐여주고는 일행들과 함께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이총각 지부장의 결심공판장 소란 혐의로 구류 20일을 살고 나오던 날 곧바로 부산행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으니, 동일 해고자들의 행색은 사실 말이 아니었다. 방용석의 세심한 배려는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목욕도 하고 아침도 든든하게 먹은 최연봉을 비롯한 해고자들은 난생처음 태종대 구경에 나섰다. 한여름 날씨답게 후덥지근하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전날에 비해 시원해진 날씨가 차라리 고마웠고 넓은 유원지에 인적이 별로 없으니 번거롭지 않아 좋았다. 구예금은 전날 밤 갔던 해운대 바닷가에서 파도에 플라스틱 슬리퍼마저 잃어버리고 맨발 신세가 되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그들은 누가 봐도 여행객이라기보다는 노숙자에 가까운 행색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온갖 시름을 내려놓고 푸른 숲과 탁 트인 바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전창순이 소리쳤다.

“어, 저기 저거 그때 그 차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있는데 또 누군가가 외쳤다. “박복례다! 김인태, 정봉용이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보니 휴게실을 지나 산책을 즐기고 있는 세 사람이 눈에 띄었다. 해고자들과 시선이 딱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새파랗게 질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박복례는 재빠른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자가용을 타고 도망을 갔지만 당황한 김인태와 정봉용은 해고자들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최연봉 일행은 지금까지 쌓였던 원한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듯 그들을 향해 폭력을 휘둘렀다. 그동안 숱하게 맞기만 하고 때려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손바닥으로 남을 때리면 내 손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통굽이 달린 슬리퍼를 벗어 들고 닥치는 대로 내려치고 할퀴고 꼬집고 쥐어뜯고 따귀를 때리며 쌓이고 쌓였던 분노를 그들에게 다 쏟아냈다. 불과 몇 달 전 기세가 등등해 똥바가지를 들고 여성 조합원들을 향해 짐승 같은 짓을 했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험악했던 기운들은 간데없고 목숨만 살려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난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습니까? 처자식하고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으니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최연봉 일행은 그들을 태종대 밑으로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전창순이 말리지 않았으면 어쩌면 큰 사고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 이 새끼! 인천에 가는 대로 당장 노조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예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124명 당장 복직시켜!” “아이구, 그것만은 제 맘대로 어떻게…, 그저 목숨만 살려주세요.”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그토록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지만 막상 폭력을 휘두르고 보니 그들 역시 가련한 인간이었다. 파리나 진배없이 싹싹 빌고 있는 그를 잡아 족친들 해결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맞고 있는 사람도 때리고 있는 자신들도 처량해 끝내 해고자들은 퍼질러 앉아 엉엉 울었다. 찢어진 웃옷을 벗고 허연 뱃살을 드러낸 그에게 최연봉의 분홍 티셔츠를 입혀 주자 김인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음에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런데 그때 식당 주인의 신고로 경찰 오토바이가 출동해서는 해고자 일행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청년들 몇 명이 나타나 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따라가서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싸움을 지켜보면서 동일방직 해고자임을 알아봤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참견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김인태가 돌아와서 경찰에게 같은 회사 동료인데 말다툼을 좀 한 것뿐이니 봐달라고 하며 잘 마무리가 됐다. 어차피 한솥밥을 먹은 노동자들인데 권력에 휘둘려 원수가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한없이 서글펐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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