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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길을 찾아서] 연극 공연하다 울분 못이겨 거리로 / 이총각

등록 2013-08-18 19:27수정 2013-08-18 21:11

1978년 9월2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서 ‘똥물 사건’을 연극으로 재연하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격앙된 나머지 앞장서 뛰쳐나가려다 곧바로 문 앞에 대기중이던 경찰에 연행됐다. 사진은 당시 기독교회관 복도에서 기도회 참가자들과 경찰이 대치중인 모습. 사진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1978년 9월2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서 ‘똥물 사건’을 연극으로 재연하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격앙된 나머지 앞장서 뛰쳐나가려다 곧바로 문 앞에 대기중이던 경찰에 연행됐다. 사진은 당시 기독교회관 복도에서 기도회 참가자들과 경찰이 대치중인 모습. 사진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67
1978년 9월22일 저녁 6시20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 100여명의 해고자들과 400여명의 관객들이 모인 가운데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를 위한 금요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기도와 설교 등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었고,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복도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행사를 지켜보았다. 1부 예배가 끝나고 2부 순서가 시작되자 이총각은 연단에 올라 ‘동일방직 민주노동운동 수호투쟁동지회’ 선언문을 낭독했다.

연극 공연은 저녁 7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객석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고 연극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모두들 숨을 죽이며 집중하고 있었다. 연극은 투쟁 사례들을 엮어 대본으로 만들었고 중간에 해설자가 사건 경위에 대해 설명을 붙이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극에 출연한 해고자들은 혹시 대사가 틀리거나 잊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노심초사했던 것과는 달리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순조롭게 잘 진행하고 있었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 해고자들은 절대로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면 관심 있는 관객들과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토론시간도 마련하기로 계획했다.

며칠 전, 공연 전반에 대해 점검을 하면서 출연자들은 연극이 끝난 뒤 펼침막을 들고 회관 밖으로 나갈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다시 동일 해고자들이 앞장을 서야 하고 또다시 잡혀가고 구속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것에 이젠 지쳤고,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디 가서 취직하는 건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의견은 해고자들 사이에 설득력이 있었다. 애당초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동일방직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남동생 학비에 가족들 먹여 살리는 일이 그들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연극이 점점 똥물사건 이야기로 나아가자, 힘들었던 순간들이 생생히 떠오르면서 해고자들의 감정이 격앙되기 시작했다.

“해설자: 겨우 달아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여공에게까지 똥걸레를 휘둘렀습니다. 그래도 직성이 안 풀려 달아나는 여공들의 머리에 똥통을 뒤집어씌웠습니다.”

“여공 3: 경찰 아저씨 도와주세요.”

“경찰 3: 야 이 쌍년아! 입 닥쳐! 이따가 말릴 거야.(똥을 뒤집어쓴 그 여공만 무대에 남고 모두 퇴장한다.)

“여공 3: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여공 2: 어머니!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연극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출연한 해고자들이나 객석의 해고자들이나 관객들이나 모두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대본과는 상관없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순간 이총각은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떠올라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두들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출연자들을 중심으로 강단에 걸어뒀던 펼침막을 뜯어 들고 밖을 향해 나갔고 뒤를 이어 객석에 있던 해고자들도 따라 나갔다. 하지만 앞장서 나갔던 10명의 출연자들은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연행돼버렸다. 이미 현관과 계단 아래에는 수백명의 기동경찰과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구호를 외치며 밖으로 몰려나갔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자 박정희는 물러나라” 모두 한목소리로 노동자들의 권익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열망하는 구호들을 외쳤다. 그러는 와중에 누군가 “박정희는 빨갱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때 경찰들의 돌격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연행되고 폭력을 당해왔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었지만 그날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친다. 모두들 “오늘은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찰의 폭력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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