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고성 등 올 체불임금 99억
월급 못받은 조선 하청노동자 거리로
“압류 문자 올까 깜짝깜짝”
정부·국회·노사 협의체 꾸려
안전망·일자리 나누기 고민
제2의 쌍용차 사태 막아야
월급 못받은 조선 하청노동자 거리로
“압류 문자 올까 깜짝깜짝”
정부·국회·노사 협의체 꾸려
안전망·일자리 나누기 고민
제2의 쌍용차 사태 막아야
“대출이자도 못 갚고 휴대전화 요금도 못 내고 있다. 은행에서 압류하겠다는 문자가 올까봐 문자 받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지난 20일, 경남 고성 에스티엑스(STX)고성조선해양 정문 앞에는 노동자 20여명이 손팻말을 들고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고 있었다. 사내하청업체 ‘삼원’ 노동자들이다. 노동자 배아무개(51)씨는 “지난해 말부터 임금이 일부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업체도 일감이 없어 그냥 버텼다”며 “하지만 임금이 석 달이나 밀려 이렇게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 쪽은 이미 적자가 6억원을 넘어 임금을 줄 능력이 안 된다고 두 손을 든 상태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있는 우리나라 조선산업 최대 거점도시, 거제의 경기는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다. 21일 고용노동부 자료를 보면 거제·통영·고성 지역의 체불임금 규모는 올 1~3월 99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6억원)보다 3배나 많아졌다. 임금을 체불당한 노동자는 1954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991명)의 2배다. 대부분 두 조선사의 하청업체 노동자들이다. 조선산업 구조조정의 파고가 이미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이 파고는 조만간 두 조선사 직원들에게도 밀려들 것으로 보인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원칙적인 동의 입장을 밝히면서 조선·해운·철강 등 불황의 늪에 빠진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은 인력 구조조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따른 노동자와 해당 지역 자영업자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과 노동계는 ‘제2의 쌍용차 사태’를 막으려면, 시급히 노사와 정부는 물론 국회까지 참여한 사회적 대화의 틀을 마련해 구조조정의 범위와 절차, 일자리 나누기와 사회안전망 강화 등 고통을 최소화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성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기업들 상황과 구조조정 계획 등을 수면 위로 올려 문제를 확인하고 대책을 협의할 수 있는 사회적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노조와 기업, 국회까지 참여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구조조정에는 사회적 대화가 전제돼야 한다. 노사정이 최소한의 합의를 통해 구조조정을 진행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흐를 것”이라고 우려했다. 배규식 노동연구원 연구위원도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가 된 ‘쌍용차 사태’ 때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노동자들만 내보내는 방식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논의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구조조정의 범위다. 배규식 연구위원은 “현재 위기산업들의 어려움이 일시적 불황 때문인지, 구조적인 하락세로 접어든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어느 정도의 구조조정이 필요한지를 투명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인력 감축이 불가피할 경우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도 핵심적으로 논의돼야 할 부분이다. 정이환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사회학)는 “유럽 나라들은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해고 규모를 최소화하거나,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통해 실업자의 생계와 재교육을 책임져준다”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회적 룰도 없고 안전망도 부실해, 구조조정이 발생하면 극한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계기를 통해 일자리 나누기와 사회안전망 강화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간 인수합병이 이뤄질 경우 고용승계 문제도 논의돼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직업훈련을 받는 대가로 실직자에게 1년 동안 전 임금의 80%를 지원해준다. 독일은 1993~1994년 노사합의를 통해 노동시간을 35시간에서 28.5시간으로 단축함으로써 3만명의 정리해고를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현재 실직과 임금 체불이 이미 시작된 비정규직·하청노동자에 대해서는 정부의 긴급지원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박정미 금속노조 정책실장은 “연말까지 현대중공업 1만명, 대우조선 1만명의 비정규직이 해고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안전망이 없어 거리에 내앉을 수밖에 없다”며 “지난달에 정부를 찾아가 대책을 만들어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말했다.
경영진과 대주주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정미 실장은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먼저 명확하게 하고 인력 조정을 논의해야지, 노동자부터 자른다고 하면 우리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주주 쪽에서도 사재 출연을 하고, 기업도 불필요한 부동산을 처분하거나 쌓아놓은 현금을 털어내는 등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한편 유일호 부총리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으로 우려되는 일자리 충격을 줄이기 위해 기존 법적 보호장치 외에 추가 대책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현재 철강·해운·조선 등 업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하고, 해당 업종 실업자에게 전직·재취업 지원을, 사업주에겐 고용유지지원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날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구조조정은 여·야·정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라며 ‘여·야·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거제/정은주 기자, 이창곤 박태우 김경락 기자 ejung@hani.co.kr
이슈구조조정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