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사무금융노조 조합원들이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정부가 조선·해운 등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추진하는 양적완화가 결국 ‘노동자 구조조정용’이라며, 이의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노조가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상대만 질책하면 사회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유노조기업과 무노조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가 극심하게 커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박유기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
전자는 한국노총이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총선 이후 정세 전망과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토론회에서, 후자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업노동학회 등이 11일 주최한 ‘대안적 산별교섭 모색을 위한 노사정 대토론회’에서 나온 쓴소리들이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여소야대로 정치지형이 바뀌는 20대 국회, 급물살을 타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 심화되는 노동시장 양극화 등의 여건 속에서 새로운 정책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재계·경영계 쪽에서도 일부 노동이슈와 관련해 태도 변화를 보이며 대안을 궁리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11일 한국노총 정문주 정책본부장은 전날 토론회와 관련해 “기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전환의 시기에 새로운 정책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토론회를 열었다”고 말했다. 발제자로 나선 고원 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정치학)는 “노조가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기에 급급한 이익집단의 모습을 넘어서야 한다”며 “노조가 당장 전개되는 경제 구조조정에서부터 전향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전 교수는 “구조조정을 회피하거나 사내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잘라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결국 노조운동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면 선제적으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구 노력과 함께 비정규직이나 파견근로자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발제자로 참석한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도 “양대 노총은 상대적 고임금과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해 일자리와 임금을 나눔을 선제적으로 제안하는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정부와 재계의 ‘정규직 책임론’에 침묵하거나 부정하는 입장을 고수해왔다”며 “노동 양극화와 청년 취업난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을 고수하면 사회적 신뢰를 얻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토론자로 나선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등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 계층 노동자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며 “양대 노총과 주요 산별 노조가 사회연대기금을 우선 결의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정부와 자본을 압박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11일 토론회에서 산업별 노조로 전환하는 징검다리로 현대기아차그룹사 공동교섭의 역할을 강조했다. 2006년 현대·기아자동차노조는 산별노조로 전환했지만 현대·기아차그룹이 산별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올해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 노조는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서 국내 생산 확대와 조합원의 고용 안정을 논의할 ‘자동차 철강 철도산업발전 미래전략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것을 뼈대로 하는 공동요구안을 내놓았다. 박유기 현대차지부장은 “노동시장 내 격차와 차별을 완화하고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원하청 간의 불공정 거래를 뿌리뽑고, 노조의 책임성을 강화하려면 초기업 교섭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계에서도 태도 변화가 엿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이어 한국경영자총연합도 근로시간 단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경총 노동경제연구원은 11일 ‘근로시간저축계좌제 도입 운영상 쟁점과 기대효과’라는 제목으로 연구포럼을 개최했다. 근로시간저축계좌제란 연장·야간·휴일근로 등 초과근로시간을 ‘계좌’로 적립한 뒤 휴가로 사용하는 제도다. 1990년대 독일 폴크스바겐이 경영위기 상황에서 대량해고 대신 이 제도로 근로시간과 임금을 줄이고 고용을 유지해 주목을 받았다.
발제자인 서인오 노동법제연구실 전문위원은 “유휴인력이 발생했을 때 해고를 선택하기보다는 근로시간계좌제를 활용하면 기업이 고유한 인적자원을 보존할 수 있고 조직구성원의 동요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단, 회사가 노동자의 휴가 사용 시기를 선택하고 초과근로시간과 휴가를 1대1 비율로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전경련은 근로시간 단축이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 고용 증가, 생산성 제고, 노사 상생 등 1석4조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기존에 재계는 근로시간 단축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정은주 박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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