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관리자)! 고맙다! 사랑한다!”
지난 5월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조양호 일가 및 경영진 퇴진 갑질 스톱(STOP) 촛불집회’ 참석자 500명(대한항공 직원 350명, 시민 150명)은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을 개설한 ‘관리자’를 힘차게 부르며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관리자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세례 갑질이 보도된 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경영에 대한 제보를 모으며 언론보도를 주도했다. 나아가 대한항공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촛불을 들고 ‘조양호 OUT’을 외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회사 쪽에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온 관리자가 <한겨레21>과 인터뷰에 응했다.
촛불집회를 위한 성금이 3천만원을 넘어섰다. 촛불집회를 지켜봤던 소감은?
“1차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직원들만의 힘으로 다소 어설프게 진행됐다.
집회 당일 그렇게 많은 인원이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집회신고도 100명을 했다. 그런데 세종문화회관 계단이 꽉 들어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와주셨다. 참석한 직원과 나는 뭉클한 마음이었다.
우리 힘으로 뭉쳐서 이렇게 무언가를 해낸 적이 없었다. 동료애를 느껴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날의 의미는 더 컸다. 소셜펀딩 금액이 단 3일만에 목표치(3천만원)를 초과한 것은 사상 최초다. 목표를 상향하기 이전의 애초 목표(1천만원)는 100분 만에 달성됐다. 직원들과 국민들의 관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연대하는 활동을 해본적이 없다고 했는데, 직접 해본 느낌은?
“너무나 힘들다는 표현 밖에 할말이 없다.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모든 일(기획, 섭외 등)을 혼자 해야해 너무 막막했다. 촛불집회 당일에도 사회자 한명이 집회 2시간 전에 갑자기 불참을 통보해 박창진 전 사무장님이 단독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고도 좋은 결과를 냈기에 더 뜻깊었다 생각한다. 2차 집회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더 꼼꼼하게 준비 중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 왼쪽부터 첫째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셋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 회장, 둘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그래픽 / 장은영
과거에 다른 회사의 갑질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번 일을 헤쳐나가면서 마음가짐이 어떻게 바뀌었나?
“나는 너무나 평범한 회사원이고 땅콩 회항(2014년) 때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자괴감을 느꼈을 뿐 그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조현민의 물컵 갑질을 보면서 박 전 사무장이 생각났다. 녹취파일을 최초 언론에 제보한 직원도 그렇게 희생되면 안된다는 생각에 발로 뛰며 단체대화방을 만들었다. 내가 구심점이 돼 대한항공을 바꿔보자는 결심을 했다.”
다른 기업에도 총수 일가의 갑질은 많았다. 하지만 대한항공에서 이렇게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대한항공은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돼 있다. 이 때문에 파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3대 노조(대한항공노동조합·조종사노동조합·조종사새노동조합)는 모두 사쪽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노조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직원들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사쪽은 이를 악용해 쥐어짜기식 경영을 계속했고, 불만은 30년 동안 쌓여왔다.
결국 불만은 있으나 표현할 방법이 없는 절박함 때문에 우리가 힘을 모을 수 있었다.
우리에겐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구심점을 찾는데 30년이 걸렸고, 우리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에게 제보내용을 전달하고, 보도시점을 조율하는 과정이 많이 힘들었다고 했는데.
“언론 대응 부분이 정말 너무 힘들었다. 텔레그램을 통해 제보가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동시에, 수많은 매체의 기자가 접촉해왔다. 사법기관에서까지 연락이 왔다. 하루에 3시간 이상을 못잤다. 이틀밤을 잠 못 이룬적도 몇번 있다.
자고 일어나면 6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온다. 읽는데만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모두 응답할 수 없었다.
제보내용을 취합하고 정리해서 기자와 수사기관에 넘기고 다시 질문이 오면 제보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팩트체크를 꼼꼼히 하고 기사를 내보냈다.
그런데 신문사와 방송사가 섞여 있어 보도시점을 놓고 마찰이 생겼다. 일반인인 내가 조율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처음 제보방을 열기 전에 직접 섭외를 한 매체(6개사) 기자들 외에 다른 분은 받지 않으려 했다. 내 신분 노출과 정보의 기밀성, 그리고 제보자의 신분보호가 이유였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불러 매체를 차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아니었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결국 여러 언론사를 다 입장시키고 제보를 모두 공유했다. 정보는 다 유출됐고, 심지어 제보자가 본인이 특정되는 부분을 가려달라고 한 부분도 그냥 기사로 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기자 제보내용 전달방은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인터뷰를 빌어 매체 차별이 아니었고, 혼자 진행하다 보니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임을 말하고 싶다.”
‘대한항공 갑질 불법 비리 제보방’에 올라온 채팅 내용을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그래픽 이재호 기자
제보방을 다시 열 계획은 없는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제보내용은 어떻게 할 예정인가?
“제보방은 일단 다시 열 계획이 없다. 공개되지 않은 내용의 유무와 향후 방침은 말할 수 없다. 제보는 앞으로도 받을 계획이다.”
아직 사쪽에 신분이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회사 쪽에서 회유 움직임은 없었나?
“신분노출 걱정이 많은 건 사실이다. 겁도 난다.
회유는 아니고 내가 누군지 파악하기 위해, 가짜 기자 행세를 하며 내 연락처나 만남을 요구하는 경우가 몇번 있었다.”
민주노총과 정당의 개입은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현재 대한항공 노조(대한항공조종사노조)의 상위단체가 민주노총이다. 그들이 개입하면 역효과만 난다. 순수성을 의심받게 된다.
오로지 우리 힘만으로 해내야하는 당위성이 우리를 뭉치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쭉 이 기조를 이어가려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집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거다.
언젠가는 단톡방(제보방)에 있는 직원들도 한 쪽으로 가야하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어떤 단체를 스스로 조직해 대한항공에 정당한 권리주장을 해야할 것이다.
나는 그 직전까지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번 사태 이후 대한항공의 조직 문화가 어떻게 바뀌리라 예상 혹은 기대하는지?
“국면이 어떻게 될지 몰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 조양호 회장 일가와 측근 경영진은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 보다는 시간끌기, 법률적 대응, 증거인멸, 회유에만 집중하고 있다. 안타깝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제보 이후 수사(경찰)당국과 관세청의 조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경찰당국과 관세청 수사의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진행 중이라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이미 증거인멸을 다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관세청 조사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압수수색을 당해야 할 세관이 압수수색을 하고 있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나?”
언론 보도 중에 촛불집회에 대해 악의적인(가면을 벗으라고 요구하는) 보도도 있었다.
“대한항공이 과거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직원들을 탄압했던 것을 보면 우리가 왜 익명의 단톡방을 만들고 가면을 쓰는지 이해할 수 있을거다.
그런 내용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은 그런 말(가면을 벗으라)을 하는 거라 생각한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땅콩회항’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 등이 25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열린 정의당 정당 연설회에서 발언을 마친 뒤 대한항공의 황제경영과 갑질경영을 규탄하며 손팻말에 물을 붓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회사의 긍정적인 움직임이나 분위기 전환은 없었나?
“전혀 없다. 대한항공의 경영진이 그렇게 융통성 있는 집단이 아니다. 오로지 총수 일가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꼭두각시들이다.”
필수공익사업장 문제에 대해서 강조를 했다. 이를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필수공익 사업장 폐지는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껏 사측이 필수공익사업장을 빌미로 직원들을 착취해 왔다. 그것을 폐지하고 정당한 권리주장을 할 수 있게 해야한다.
궁극적으로는 국회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전히 대한민국 곳곳에는 고용주와 총수 일가의 갑질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대한항공 사례를 관심있게 보고 있다 이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대한항공 촛불집회는 지금까지의 노동운동과는 약간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기존의 단체들은 이미 부패해 기댈 곳이 되지 못한다.
이제 그 단체들을 벗어나 노동자 개개인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할 때다. 고인물을 퍼내고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퓨전 노동자 연합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일단 촛불집회와 조양호 회장 일가의 불법 제보를 이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보에만 그치지 않고 좀 더 강력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완성을 앞두고 있다.”
끝으로 한겨레 21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단지 한개 사기업의 문제라 생각하지 말아달라.
우리나라에서 횡행하는 대기업 재벌들의 불법과 갑질 행태에 경종을 울리려 한다. 사회 정의가 바로 서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시민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