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노동

죽은 미누가 여전히 외친다 “스탑 크랙다운”

등록 2018-11-04 08:58수정 2018-11-04 17:14

[토요판] 이슈
‘스탑 크랙다운’ 미누의 삶과 죽음

2009년 10월 한국 생활 18년 만에
강제로 쫓겨난 ‘스탑 크랙다운’ 미누
9월 그가 주인공인 영화 상영 맞춰
네팔 추방 뒤 처음으로 짧은 입국
귀국 한 달 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추방 뒤 사회적 기업가로 활동하며
국내 일자리 만들어 가족 해체 방지
방한 때 ‘밴드 세우자’ 약속했는데…
죽음 직전 다시 시작된 집중 단속
이주노동대회서 외쳐진 그의 목소리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의 리더이자 보컬 미누가 사망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안녕, 미누>가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강제 추방 9년 만에 짧은 입국이 허용됐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한국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관객들을 보며 미누는 말을 잊고 울먹였다. “언젠가 한국에서 밴드를 다시 세우자”며 멤버들과 약속하고 돌아간 그는 귀국 한 달 만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스탑 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을 외치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다시 집중 단속이 시작됐다.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의 리더이자 보컬인 미누(미노드 목탄)씨가 지난 1월 네팔을 찾아온 멤버들과 함께 강제추방(2009년 10월) 9년여만에 첫 공연을 하고 있다. 그가 공연 때마다 손에 끼는 빨간 목장갑은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상징한다. 지혜원 제공
이주노동자 밴드 ‘스탑 크랙다운’의 리더이자 보컬인 미누(미노드 목탄)씨가 지난 1월 네팔을 찾아온 멤버들과 함께 강제추방(2009년 10월) 9년여만에 첫 공연을 하고 있다. 그가 공연 때마다 손에 끼는 빨간 목장갑은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상징한다. 지혜원 제공

안녕을 묻자마자 미누의 노래가 멈췄다.

“나 이제 죽어도 좋아”

“사아아공의의 배엣노오오래 가아무울거어리이이며~ 삼하아악도오오오 파도오오 기이이피 숨어어드느으은데~.”

9월14일 밤 서울의 한 노래방에서 미누(네팔 이름 ‘미노드 목탄’)가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한국이 ‘우리와 살 수 없다’며 내쫓은 그의 입에서 한국인보다 한국인 같은 발음의 노랫말이 흐르고, 꺾이고, 구르며 ‘당신과 내가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다. 네팔 신문에서 남산타워를 보고 21살(1992년) 때 ‘88올림픽의 나라’를 찾아온 그는 첫 일터였던 한 식당에서 목포 출신 ‘주방아주머니’에게 그 노래를 배웠다. 손님이 없을 때 아주머니는 식당 노래방 기계로 고향의 노래를 부르며 흐르고 꺾이고 떠돌면서 살아온 타향의 시간을 다스렸고, 미누는 아주머니의 노래와 발음을 따라 배우며 흐르고 꺾이고 쫓기면서 살아갈 한국의 시간에 스며들었다.

노래방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미누가 다시 만난 밴드(‘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에게 말했다.

“나 이제 죽어도 좋아.”

그 노래와 그 말을 미누는 9년 만의 짧은 입국을 선물한 영화 <안녕, 미누>(9월13~20일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감독 지혜원)에서도 했다. 한국 생활 18년째 되던 해(2009년 10월) 강제추방 된 그가 고향 포카라의 페와호수에서 배 위에 앉아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네팔을 찾아온 밴드 동료들과 공연을 마친 뒤엔 바닥에 주저앉으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 이제 죽어도 돼. 이제 한이 없어졌어.”

그의 말처럼 그는 떠났다.

영화제 관객과의 대화(9월15일)를 끝으로 네팔로 돌아간 그는 꼭 한 달 만(10월1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과 싸우며 그는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눈~ 물~ 로~.”

지난 1월 미누가 네팔 관객들을 향해 한국어로 외쳤다.

공연 전 그는 네팔 파탄(수도 카트만두 남서쪽 도시)의 자기 방에 걸린 액자에서 빨간 목장갑을 꺼냈다. 한국에서 보내준 목장갑을 그는 귀한 작품처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뒀다. 손가락 끝마디를 가위로 잘라낸 장갑을 끼고 미누가 멤버들의 연주에 맞춰 노래했다.

“기계 사이에 끼어 팔딱이는 손을 비닐봉지에 싸서 품에 넣고서, 화사한 봄빛에 흐르는 행복한 거리를, 나는 미친놈처럼 한없이 헤매 다녔지.” (스탑 크랙다운 2집 ‘손무덤’)

그는 한국에서 공연할 때마다 빨간 목장갑을 끼고 마이크를 잡았다. 목장갑은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일을 하며 한국을 바닥부터 지탱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상징했다. 빨간색은 기계에 잘려나간 뒤 식어버린 그들의 피 묻은 손을 뜻했다. 그는 프레스에 물려 오른팔이 끊긴 네팔인 후배를 떠올리며 술자리에서 울곤 했다.

‘스탑 크랙다운’이 2010년 발매한 2집 앨범 <freedom(자유)>.
‘스탑 크랙다운’이 2010년 발매한 2집 앨범 .
미누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붉은 손’을 이주노동자들의 손이 대체하던 1992년 2월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는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 1세대였다. 한국에 이주노동을 정의하고 규정할 제도와 정책이 전혀 없을 때부터 그는 일했다. 식당, 가스벨브공장, 김치공장, 봉제공장을 옮겨 다니며 노동했다. 2003년 고용허가제(1993년 시행 뒤 ‘노예연수제’란 비판을 받아온 ‘산업연수생제’에서 전환)를 도입한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추방(열흘 만에 연행 1233명과 강제출국 606명)하면서 그는 빨간 목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추방의 공포와 절망으로 스스로 택한 죽음이 잇따르자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과 성공회성당(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모여 농성했다. 그해 11월15일 성공회성당에서 만난 미누와 소모뚜·소띠하(미얀마) 등이 다국적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down·단속을 멈춰라)을 결성했다. 미누의 손은 이주노동과 인권 현장마다 나타나 하늘을 찌르며 빨갛게 펄떡였다. 그는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현 이주민방송 MWTV) 대표로도 활동하며 영상으로 이주민과 한국인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스탑 크랙다운’을 외치던 그가 2009년 10월 ‘크랙다운’ 됐다. 이명박 정부는 출근하는 그를 방송국 사무실 앞에서 표적 단속해 보름 만에 출국시켰다. 법무부는 “불법체류자가 촛불집회 등 정치 활동에 가담했다”며 추방 이유를 설명했다.

미누씨가 네팔에서 아이들과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지혜원 제공
미누씨가 네팔에서 아이들과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지혜원 제공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갇혀 있을 때 미누는 93호 방에서 먼저 잡혀온 ‘선배’들과 생활했다. ‘이란인 선배’의 손엔 손가락 하나가 없었다. 검지를 기계에 빼앗긴 그는 가게에서 중지로 물건 값을 물었다가 욕을 먹었다며 웃었다. 미누는 빨간 목장갑처럼 붉었을 그의 손을 바라보며 웃지 못했다.

“하나도 재미없었다. 나는 선배 손을 잡고, 손가락을 잡고, 만지고 또 한참을 만졌다.”(보호소에서 쓴 일기)

“다시 밴드 세우자” 약속했는데

“일하면서 음악 들으면 안 돼요. 잘못하면 손가락 잘려요.”

네팔의 한국어학원에서 미누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는 한국어를 가르친다기보다 한국인 사장에게 밉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듯했다. 한국 취업이 확정된 학생들은 따로 모아 교육하기도 했다.

“한국은 엄청 빨리빨리 일하는 나라여서 여러분은 느리다는 야단을 많이 맞을 거예요. 여러분은 빨리빨리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장 눈에는 느리다고 보일 수 있어요. 그러면 스트레스 받게 될 거예요. 스트레스 받을 때는 사탕이나 초콜릿이 좋아요. 깨물어 먹지 말고 빨아먹으면서 일하세요.”(영화)

그는 학생들을 한국 식당에 데려가 밥과 반찬 먹는 법도 알려줬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한국인이 기분 나쁘지 않게 표현하는 방법도 설명했다. 한국을 먼저 겪어본 그가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미누의 교실에 한국의 진짜 모습이 있었다.

미누씨가 네팔의 사회적 기업 ‘수카와티’(한국의 아름다운가게를 모델로 설립)에서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원 제공
미누씨가 네팔의 사회적 기업 ‘수카와티’(한국의 아름다운가게를 모델로 설립)에서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원 제공
목장갑 하나 챙기지 못하고 네팔로 쫓겨난 그는 한동안 네팔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로 살았다. 그에겐 네팔의 절기와 문화가 오히려 생소했고 술 한 잔 나눌 친구도 모두 한국에 있었다. 2015년 4월 대지진이 닥치자 그는 운영하던 한국 식당을 폐업하고 구호 활동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를 피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전달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노동과 활동 경험을 살려 네팔인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가가 됐다. 한국의 아름다운가게를 모델로 ‘수카와티재단’(지난해까지 대표 역임)을 설립했다. 경제력 있는 사람들로부터 옷을 기증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싸게 팔았다. 귀국한 노동자들이 만든 단체 ‘엉크루네팔’의 부회장으로 이주노동에 대한 네팔 정부의 책임 강화를 촉구했다. 그는 트립티(산재 이주노동자들의 자활을 돕는 한국의 사회적 기업)의 네팔 대표이기도 했다. 공정무역으로 커피 바리스타를 양성하고 매장도 열었다.

2018년에만 7만4천명(9월 이전)의 네팔인들이 고용허가제 취업을 위해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했다. 네팔의 10가구 중 6가구가 이주노동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미누는 네팔에 일자리를 만들어 이주노동에 따른 가족 해체를 막고 싶어 했다. 한국어학원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었다.

“나 들어왔어.”

9월13일 오후 5시6분. 밴드 멤버들의 단체대화방에 그의 문자가 떴다. 소모뚜가 반겼다.

“방가방가.”

미누가 물었다.

“오늘 (영화제에) 오는 거?”

“당근 가야지. 형 15일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제주도 데려다줄까? ㅎㅎ.”

미누가 추방 뒤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안녕, 미누>가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영화제 사무국과 경기도의 요청으로 2박3일만 입국이 허용됐다.

1년 5개월 전 그는 인천공항까지 왔다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 지난해 4월 서울국제핸드메이드페어에 참여하기 위해 네팔 한국대사관의 비자를 받고 온 그가 입국을 거부당했다. 강제출국 된 사람은 5년 동안 입국이 금지(출입국관리법 제11조 제1항 제6호)됐으나 법무부가 그에게 제시한 기간은 10년이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다시 비행기를 탄 미누는 네팔에 도착한 뒤 한국 방문 기간만큼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입국 거부 사실이 알려질까 걱정했다. 미누는 네팔 여성들의 전통수공예품을 박람회에서 팔아 수익금을 돌려줄 계획이었다. 자신이 한국에서 범죄자처럼 취급되는 현실을 미누는 그들에게 모르게 하고 싶었다.

입국이 좌절된 그를 위해 멤버들이 네팔로 날아가 공연(2018년 1월)했다. 2013년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도 공연을 접은 ‘스탑 크랙다운’이 미누 추방 뒤 처음으로 함께 노래했다. 빨간 목장갑을 낀 미누는 마이크를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공연 뒤 그는 ‘이달의 가장 행복한 얼굴’로 현지 신문에 실렸다.

지난 9월13일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추방 9년 만에 입국한 미누씨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안녕, 미누>(개막작)의 지혜원 감독과 포토월에 섰다. 지혜원 제공
지난 9월13일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추방 9년 만에 입국한 미누씨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안녕, 미누>(개막작)의 지혜원 감독과 포토월에 섰다. 지혜원 제공
한국에서의 2박3일은 바쁘고 짧았다. 미누와 멤버들은 9월14일 저녁에 만났다.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미누가 노래했다. ‘목포의 눈물’을 불렀고 가요제(1999년 KBS 외국인 예능경연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은 녹색지대’의 노래도 불렀다. 그의 입국 소식이 알려지면서 공연 섭외도 두 건이나 들어왔다. “자유롭게 올 수 있게 되면 밴드를 다시 세우자”고 약속한 뒤 그들은 헤어졌다.

다시 시작된 집중 단속

“이제 죽어도 좋아.”

송명훈(한국인 멤버·39·드럼)이 “미누 형”의 죽음을 전화로 전했을 때 소띠하(44·베이스)는 한 달 전 노래방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나 울었다.

‘더사인’(네팔 최대 명절)을 맞아 누나가 고향에 간 사이 미누는 홀로 죽어 발견(현지시각 10월14일 저녁)됐다. 방바닥에 쓰러진 채로 한쪽 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있었다. 지혜원 감독이 장례 장소(10월18일)에 도착했을 때 네팔 친구들이 틀어놓은 스탑 크랙다운의 노래가 미누를 배웅했다. 밴드의 네팔 공연 직전 그가 액자에서 꺼낸 빨간 목장갑이 다시 액자에 넣어져 장례식에 와 있었다.

미노드 목탄. 1971년생. 향년 47. 결혼하지 않았고 추방 뒤 누나 가족과 살았다. 단속·추방 반대 농성장에서 한국말에 서툰 동료들이 따라 부르기 쉽도록 구호를 노래로 만들었다. 그 노래를 부르며 그의 인생도 바뀌었다. 9월15일 한국을 떠나며 감독에게 문자를 남겼다. “살면서 이런 순간이 또 있네요. 고달픔, 힘듦, 그리움, 아쉬움, 불행과 행복. 감동이기도 한 삶. 이 가운에 우리의 만남은 하늘의 뜻.” 네팔 전통 장례를 따라 화장됐다. 라마 승려들이 극락왕생을 빌었다.

밴드 멤버들은 10월21일 오전 인천시 부평의 한 미얀마 절에 모여 미누의 추도법회를 가졌다. 법회를 마친 소모뚜(스탑 크랙다운 기타·43)는 부평역으로 향했다. ‘딴저테이 미얀마 노동자 살인단속 규탄 추모제’가 오후 2시부터 열렸다.

미누씨가 사망한 뒤 한국의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이 10월21일 경기도 부평의 한 미얀마 절에 모여 그의 추도 법회를 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소모뚜(기타), 송명훈(드럼), 소띠하(베이스)씨. 소띠하 제공
미누씨가 사망한 뒤 한국의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이 10월21일 경기도 부평의 한 미얀마 절에 모여 그의 추도 법회를 하고 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소모뚜(기타), 송명훈(드럼), 소띠하(베이스)씨. 소띠하 제공
8월22일 식당에서 점심밥을 먹던 딴저테이(26)가 들이닥친 단속반을 피해 창문을 넘다 추락했다. 그와 식사하던 동료는 창틀에 올라간 그의 다리를 단속반이 붙잡아 중심을 잃고 머리부터 떨어졌다고 증언(9월30일 부평역 집회)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의 의료기록엔 추락 이유가 ‘자살’로 기입됐다. 이주노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토끼몰이식 단속’이 부른 죽음이라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법무부는 “외국인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단속 직원의 제지를 밀쳐내고 창문을 통해 도주해 막을 수 없었다”며 책임 없음을 주장했다. 뇌사에 빠진 딴저테이는 9월8일 사망했다. 소모뚜는 진상규명에 적극 결합해 활동했다. 9월30일 집회에선 목격자의 통역도 맡았다.

딴저테이 사망 뒤 법무부는 ‘40~50대 가장의 마지막 피난처 건설현장 강력 단속’(9월20일)이란 제목의 ‘불법체류·취업 외국인 대책’(내년 3월말까지 자진출국하면 선처하되 단속되면 ‘향후 10년간 입국 금지’)을 발표했다. “국민의 일자리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고용창출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도 더했다. 다단계 하도급이 만든 건설 노동시장의 왜곡을 외면하고 ‘고용대란’ 책임을 이주노동자에게 돌리려 한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가 네팔에서 숨을 거둔 날 서울에선 ‘2018 전국이주노동자대회’에 모인 참가자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죽은 미누가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스탑 크랙다운.”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영상] ‘총·방망이 난무’ 내란의 공포 이기려…50만 시민 “힘내” 함께 불렀다 1.

[영상] ‘총·방망이 난무’ 내란의 공포 이기려…50만 시민 “힘내” 함께 불렀다

경찰, 추경호 ‘계엄해제 방해로 내란 가담’ 피의자 조사 2.

경찰, 추경호 ‘계엄해제 방해로 내란 가담’ 피의자 조사

“최상목, 윤 탄핵은 기정사실 발언”…기재부 “그런 적 없어” 3.

“최상목, 윤 탄핵은 기정사실 발언”…기재부 “그런 적 없어”

[영상] “총 쏘라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충격에 또 광화문 모인 시민들 4.

[영상] “총 쏘라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충격에 또 광화문 모인 시민들

“총 쏴서라도”…검찰 김용현 공소장으로 본 윤석열 ‘내란 일지’ 5.

“총 쏴서라도”…검찰 김용현 공소장으로 본 윤석열 ‘내란 일지’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