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공동주최로 열린 ‘상생과 연대를 위한 공공기관의 역할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회적 가치’는 문재인 정부 들어 크게 주목받는 이슈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지난해 ‘사회적 가치 실현을 선도하는 공공기관’을 100대 국정과제 가운데 12번째로 내놓았고, 올해 3월엔 사회적 가치를 정부혁신 3대 전략 가운데 하나로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내년부터는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공공기관의 경영평가 때 사회적 가치 구현이 매우 중요한 지표로 다뤄질 예정이다.
그렇다면 공공기관이 구현해야 하는 사회적 가치란 무엇인가? 얼핏 단순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이를 실행할 공공기관도, 평가할 정부도 개념을 뚜렷하게 못 잡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사장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4일 오후 ‘상생과 연대를 위한 공공기관의 역할 토론회―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실천적 모색’을 열어 이 문제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제언을 들었다. 이 토론회는, 박근혜 정부의 성과연봉제 확대에 반대한 양대 노총 공공부문 노조가 앞서 지급받은 인센티브를 환수해 만든 공공상생연대기금의 창립 1주년을 맞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열렸다.
무엇을 위한 사회적 가치인가
현재 국회에는 김경수 경남지사가 국회의원 시절 대표발의한 것과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사회적 가치 기본법안’ 2건이 계류돼 있다. 이 법안은 19대 국회 때 문재인 대통령도 발의한 적이 있다. 법안은 △인간 존엄성을 유지하는 기본권리로서 인권 보호 △재난과 사고로부터 안전한 근로·생활 환경 유지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과 협력 등 13개를 사회적 가치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가치의 구현을 ‘과제’로 받아안은 정부와 공공기관에선 혼란이 적지 않다.
이날 토론회에서 라영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공공기관연구센터 소장은 “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이 사회적 가치의 개념, 방향성, 실행 과제, 추진 방법 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공공기관 혁신 방향의 초점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차원인지, 사회적 경제와 협력인지, 혁신성장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공공부문에서의 사회적 가치 실현이 혁신의 레토릭으로 활용되지 않기를 기대한다”며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 정책과 사업을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도 “정부는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공공기관은 사회적 가치 논의가 내면화돼 있지 않아 일종의 광고 전략, 자선적이거나 시혜적인 기부 활동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효율성과 사회적 가치를 두고는 이분법적 관점이 지배적”이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의 본질은
라영재 소장은 “공공기관은 공공성과 공익성 실현을 위해 국가가 설립했고, 국회와 감사원의 예산 통제와 감사, 기획재정부와 주무부처의 감독을 받고 있어 정부 정책으로 구현된 사회적 가치 대부분을 경영과 사업에 반영하고 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은 일차적으로 공공기관의 설립목적을 효과적·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며 애초 공공기관의 설립·운영 목적 자체가 사회적 가치 실현임을 환기시켰다. 라 소장은 “김대중 정부의 공공부문 개혁부터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정상화까지 정부는 민간기업과 같이 공공기관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성과 관리를 강조했지만,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 데는 미흡했다. 그런 면에서 공공기관의 공공성 회복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초점으로 하는 (문재인 정부의) 공공기관 혁신 방향은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라 소장은 공공기관의 상위 기관인 정부의 정책 방향부터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쪽으로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때 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등이 부실해진 것은 국외 자원개발을 통해 에너지 자주율 20%를 달성하겠다고 한 산업통상자원부 탓이며, 한국수자원공사가 토목공사와 환경오염 논란에 휩싸인 것은 국토교통부의 4대강 사업 때문이었다는 점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철도공사 비상임이사인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도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는 고유사업에서 공공성을 구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오 위원장은 “역대 정부에서 했던 공공기관 개혁은 ‘돈벌이’였고, 그렇다 보니 비정규직과 자회사가 양산되고 서비스와 요금의 안정성에 문제가 생겨 사회적 가치에 위배됐다. 그렇다면 공공기관법을 고쳐서라도 공공기관의 역할을 공공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현행 한국철도공사법 제1조는 이 회사의 목적을 “철도 운영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 이 회사의 목적은 국민이 이용하는 철도 서비스의 안전과 편리함, 보편적 접근성이고, 전문성·효율성은 이를 달성할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현재 마련된 공공기관 경영평가의 사회적 가치 구현 지표는 공공기관의 고유한 공공서비스와는 큰 관련이 없는 사회책임 활동”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넘어설 대안으로, 재정적으로 적자여도 사회적으로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사회적 적자’ 개념이 담긴 사회공공회계를 개발해야 한다. 노동이사와 더불어 이용자를 대표하는 시민이사까지 운영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 참여형’ 공공기관 거버넌스 개혁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공공기관 노조의 역할은
이날 토론회에선 공공기관의 또 다른 축인 노동조합도 사회적 가치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노광표 소장은,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의 ‘노사관계 국민의식 조사연구’ 결과를 근거로 “노조 역시 기업과 더불어 비정규직, 사회적 약자, 취업난에 고생하는 청년층 등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작업장 테두리를 넘어 사회적 쟁점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사에서 국민들은 노조가 앞으로 중점을 둬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30.1%)를 꼽았다. 사회보장·세제 개혁 등 사회제도 개혁도 18.4%로 조합원의 임금 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21.9%)과 비슷한 수준의 답변이 나왔다.
이어 노 소장은 “공공부문은 대체재가 없고, 공공성이라는 가치는 공공부문 노조의 태생적·구조적 조건”이라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 가치 실현은 공공부문 노동운동의 의제를 사회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이자, 기업 활동 감시의 주도자로 나설 계기가 될 수 있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이 소통·연대할 매개 지점도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노조의 사회적 가치 실현 활동을 위해 △공공기관 노조의 산별 전환 △노조의 경영 참여와 노동이사제 도입 △노조의 정책·정치 역량 강화 △지역사회에서 역할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공공기관 노조 고유의 공공성을 지적했다. 그는 케이티엑스(KTX) 민영화 반대 파업 사례를 들며 “케이티엑스 노사 분쟁은 한 공기업 내의 노사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 노조의 역할은 기술관료적 정책 결정이 동반하는 여러 문제를 전체 사회의 공론장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로 논의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또 “공공부문에선 사회적 가치가 노동에 포섭돼야 한다. 고용안정성이 높고 노동조건이 좋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일자리 나누기에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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