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주52시간제 현장 안착을 위한 보완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고 싶습니다.”
‘전설의 레전드’ 투수 최동원. 1984년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7차전이 끝난 뒤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그가 내놓은 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동원은 1, 3, 5, 6, 7차전, 모두 다섯 경기에 나서 4승을 거뒀다.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봉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5이닝 구원승, 7차전 완투승. 운동선수 포지션 가운데 예민하기로 상위권을 내주기 힘든 투수가 하루 걸러 9이닝을 모두 던진 것도 모자라 사흘 연속 마운드에 섰다. 타는 이도, 보는 이도 피가 마르는 듯했던 그해 승부의 롤러코스터에 끝내 롯데 깃발을 꽂은 이가 최동원이었으니 경기가 끝난 뒤엔 맥이 풀리고 진이 빠져 자고 싶었을 법도 하다.
‘무쇠팔’ 최동원의 이야기는 그러나, 감동의 드라마로만 보기 어렵다. 그를 기억하는 또다른 열쇳말은 ‘혹사’다. 그가 서른둘에 조기은퇴한 이유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이 중·고교 시절부터 당한 혹사다. 1984년만 봐도 그는 정규시즌 100경기 가운데 51경기에 나섰고, 14경기를 완투했다. 최동원이 기록한 한 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223)은 그러니까 그의 어깨를 갈아넣은 결과다.
운동선수와 월급쟁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동일한 잣대로 측정하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혹사, 그러니까 오래 일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35년 전 ‘야만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대한민국의 법정 노동시간, ‘이만큼 일하는 게 적정하다’고 법으로 정한 노동시간이 주 40시간으로 줄어든 건 이미 2004년이다. 다만, 1주 최대 12시간까지 연장근로(야근)가 가능했다. 그런데 ‘1주는 주말을 뺀 5일’이라는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 탓에 휴일근무 16시간(8시간씩 2일)이 추가로 더해지며 주 최대 노동시간은 68시간이 됐다. 정부가 2018년 7월 300인 이상 기업부터 순차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주52시간제는 이를 법으로 바로잡아 실제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조처다.
여름이면 장마 탓, 겨울이면 폭설 탓에 경영이 어렵다는 재계는 주52시간제에도 예의 ‘경영상 어려움’을 들어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정부는 50~299인 사업장에도 주52시간제가 적용되는 날을 20여일 앞둔 지난 11일, 계도기간을 1년 동안 주겠다고 밝혔다. 계도기간엔 법 준수 여부를 단속하지 않아 시행 유보나 다름없다. 정부는 야근과 휴일근무를 하지 않으면 소득이 줄어드는 중소기업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는 대신, 손쉬운 ‘장시간 노동 체제 유지’를 택했다. 그러잖아도 대기업과 심한 소득 격차를 겪고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노동과 휴식시간에서도 차별을 겪게 됐다. 이대로라면 50~299인 사업장보다 더 열악한 5~49인 사업장 역시 2021년 7월에 예정대로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이라 예상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주52시간제의 예외인 특별연장근로의 ‘방어선’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동의와 노동부 장관의 인가를 얻어야 하는 특별연장근로는 자연재해나 재난, 그에 준하는 사고 수습에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이 허용 범위를 자의적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경영상 사유로 대폭 넓혔다. 갑자기 기계가 고장 나거나 교통이 정체되는 ‘돌발적인 상황’이 생겨 긴급한 대처가 필요한 경우, 원청의 갑작스러운 주문이나 대량 리콜 사태, 마감이 임박한 회계처리업무 등 ‘통상적이지 않은 업무량 폭증’으로 단기간에 처리하지 않으면 사업에 중대한 지장이나 손해가 생기는 경우,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민경제 발전에 필요한 소재·부품 관련 연구개발 등에도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특별연장근로는 기업 규모와 무관하기 때문에, 현재 주52시간제를 시행하고 있는 기업도 신청할 수 있다. 정부가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또다른 이유다.
이 글을 마감하고 있는 지금, 이번주 기준으로 50시간 넘게 근무 중이다. 여러 사정으로 일이 몰려 연장근로를 안 할 수 없었던 탓이다. 판단은 흐려지고 논리는 흩어지고 단어는 사라진다. 이렇게 신문사에서 ‘업무량 폭증으로 단기간에 이를 처리하지 않으면 사업에 중대한 지장이 초래되는 경우’는 적잖다.
어디 신문사만 그럴까. 주52시간제를 시행해도 ‘통상적인’ 업무량의 폭증으로 인한 연장근로를 막기 힘든데, 특별연장근로의 문을 활짝 열어주면 어떻게 될까? 아, 그보다, 연장근로를 시키면 그 대가로 통상임금(시급)의 1.5배를 연장근로수당으로 지급해야 하는데 ‘사장님’은 행복할까?
조혜정 사회정책팀 데스크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