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조선업계 불황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 조선업의 메카 경남 거제의 조선 노동자는 5년 전보다 4만명 이상 줄었다. 지난 한 해만 거제시의 실업급여 신청자가 8135명에 이른다. 지난해 6월 “해고를 막아보겠다”며 시가 나섰다. 선언만으로 해고의 칼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그 선언은 11월4일 시가 중심을 잡고 원청·협력사가 함께하는 협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2월, 훈련이 시작되면서 ‘거제형 조선업 고용 유지 모델’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사진은 거제의 조선소와 조선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모습이다. 거제/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코로나19 3차 유행이 절정에 이르던 12월 말, 남쪽 섬 거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월 한달에만 100명 넘는 확진자가 나왔다. 불황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취재 당일, 고용 유지를 위한 훈련 현장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날 조선소 내 확진자가 발생해 외부인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지난 12월28~29일, 1월6일 두 차례에 걸쳐 고용 유지를 위한 핵심 사업인 ‘지역특화형 긴급직업훈련 시범사업’에 참여한 노동자 84명을 설문조사하고 일부를 직접 만났다. 담장 밖에서 만난 훈련 참가자들은 “훈련이 중단되지는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그들은 당장 훈련 뒤 돌아갈 일터에 일감이 없을까 걱정했다. 84명은 해고 대신 훈련을 ‘선택’한 12년차 안팎의 숙련공들이다. 이들은 “코로나19 못지않게 해고도 끔찍하다. 2~3년 동안은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했다. 이들의 기대는 2018년 이후 국내 조선업계가 3년 연속 세계 1위의 수주실적을 내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박민정(가명·36)씨는 머뭇거렸다. “제가 작년(2019년) 여름부터 휴직이거든요. 그것보다…, 형제가 좀 많아요. 넷이요.” 마스크를 매만진다. “그리고…, 모두 조선 일을 하는데요.” 뜸을 들인다. 박씨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조선소 독(선박 건조 시설)이 있다. “저는 일단 회사에 붙어 있긴 한데요.” 사연이 와락 쏟아졌다. “설계하는 막내부터죠. 회사가 업을 접으면서 일을 그만둔 게. 제 바로 아래 남동생은 현장에 있었는데요.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받고는, 나와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겠다, 그쵸. 근데 언니는 잘 다니고 있다가 올해 희망퇴직 신청했어요. 지금 집에 있고요.”
담담했다. “바라는 게 사실 별거 없는데. 그냥 거제에서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이랑 부대끼면서 살고 싶거든요.” 원래 꿈은 교사였다. 일하다 쉬기를 반복했다. 기간제 교사였다. 아이들 눈빛이 선하다. 그것만으로 버티기는 힘들었다. 불안했다. 미련을 접기까지 5년이 걸렸다. 동생이 “함께 살자”며 설계 일을 권했다. 2015년 조선업계 구조조정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다시 5년이 흘렀다. 반전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래도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다. 결국 동생 둘은 거제에서 일이 없어 떠났다.
지난해 12월28일 경남 거제시를 찾았다. 거제시가 삼성중공업, 사내외 협력사 등의 참여로 삼성 훈련센터에서 ‘지역특화형 긴급직업훈련 시범사업’을 벌이는 현장이었다. 훈련은 지난해 11월4일 거제시, 고용노동부 통영고용노동지청 등이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의 대표, 사내협력사협의회 등 거제 경제를 지탱하는 두 조선업체와 맺은 ‘조선산업 위기 극복 및 고용 유지를 위한 상생협약’의 핵심 사업이다. 고용노동부가 훈련 참가자에게 최저임금의 150% 범위 내에서 훈련 기간(4주) 동안 인건비를 지원하면 거제시는 경남도와 함께 4대보험료 사업주 부담금을 지원(시 50%, 도 20%, 나머지 사업주 부담분 30%는 원청이 일정 부분 지원하기로 협의 중)하기로 한 것이다. 직원을 해직이나 휴직하도록 하는 대신 훈련에 참여시키면 회사가 낼 비용을 대신 내주겠다는 것이다. 업체들은 훈련이 끝난 뒤에도 고용 유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제시와 희망제작소, 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해 9월께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숙련유지를 기반으로 한 거제형 일자리 지키기 모델을 함께 구상해왔다. ‘지역특화형 긴급직업훈련 시범사업’은 지자체-시민단체-국책연구소의 협업 결과물인 셈이다. 12월, 1월에 참여한 이들은 무급 또는 유급 휴직, 권고사직이 예정돼 있었던 삼성중공업 사외협력사의 설계 부문 노동자들, 대우조선해양 사내협력사 전기·용접·배관 노동자들이다.
거제시는 올 연말까지 연인원 6천명을 목표로 한다. 6천, 해고를 막겠다는 일자리 수다. 몇년동안 이어진 세계 조선업 불경기는 한국 경제의 주력 일꾼들이었던 조선업 노동자들의 삶과 거제 경제를 망가뜨렸다. 2015년 12월 9만2164명이던 거제의 조선 노동자는 이제 5만명이 되지 않는다. 인력 감축의 피해는 주로 협력사 노동자들이 떠안았다. 없어진 일자리의 8할이 그들이다. 설계 부문을 포함한 거제의 사외협력사 노동자는 2015년 12월 6090명이었는데 2020년 11월 2610명으로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사내협력사(하청)에는 2만8539명이 적을 두고 있다. 두 인력을 합하면 전체의 63%에 이른다. 이들이 사실상 거제 조선업의 주력군인 셈이다.
원래부터 협력사 노동자 비중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조선산업의 구조조정과 고용대책>(2016)을 보면, 조선산업에서 사내협력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30년 정도 됐다. 1990년대 협력사 노동자 비중은 20~30% 수준이다가 2002년에 50%를 넘어섰고, 2015년 80%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이후 세계 1위로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업계의 인력 수요를 주로 협력사라는 이름의 하청업체를 통해 해결한 게 주원인이다.
코로나19는 가뜩이나 위태한 이들을 더 몰아붙이는 것으로 보인다. 거제시 자료를 보면, 2019년 12월 5만8135명이던 거제의 조선 노동자는 2020년 11월 기준으로 4만9478명으로 줄었다. 1년이 안 돼 8657명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이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직영)은 480명으로 5% 정도다. 나머지 95%는 모두 협력사 노동자다. 그나마 물량팀 등 단기 일자리는 제외한 통계다. 책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쓴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이를 “해고의 외주화”라고 했다. 현재 해고의 양상은 “생산의 외주화를 거쳐 위험의 외주화를 지나 도달하게 된 결론”이라는 것이다.
‘지역특화형 긴급직업훈련 시범사업’은 이런 흐름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겠다는 의지의 산물이다. 1차 훈련의 삼성 기술연수원 현장에는 15명이 훈련을 진행 중이었다. 1월4일 대우 기술교육원에서 시작된 2차 훈련에는 69명이 참여했다. 총 84명. 원래 계획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원이다. 변수는 코로나19였다. 12월 내내 거제시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했다. 조선소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조선소는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프로그램은 대폭 축소됐다. 원래 1월 2차 훈련은 보류하기로 돼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줄어들면서 재개하기로 한 것도 예정된 훈련 직전이었다. 거제시 관계자는 “그만큼 현장의 절박한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고용 유지를 목적으로 4주 이상의 직업훈련을 하는 실험은 사실상 처음이다. 박종식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불황이 닥칠 때마다 전직을 전제로 한 교육이나 훈련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고용을 유지해보겠다고 시 재정을 투입하며 나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현장의 반응은 아직 미온적이다. 제도 마련을 위한 협약에 노동계 참여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나 훈련 신청의 주체가 노동자가 아닌 업체라는 점 등은 한계로 지적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협약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함께한 희망제작소의 임주환 소장 권한대행은 훈련의 시작을 “불가피한 개문발차”라고 표현했다. “일단 프로그램을 궤도에 올려야 했지만, 이후 온전한 합의를 향한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거제의 고용절벽은 가팔랐다.
훈련은 12월 설계, 1월 전기·용접·배관으로 전개됐다. 선박이 건조되는 순서다. 12월 1차 훈련에 참가한 설계원들은 조선업이 정상 궤도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외협력사 소속으로 불안한 고용 환경에 놓여 있는데도 ‘사무직’이라는 이유로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다.
지난해 12월28일 삼성중공업 기술연수원에서 진행 중인 지역특화형 긴급직업훈련 시범사업 현장의 모습. 이날은 설계 쪽 훈련의 마지막 날이었다. 삼성중공업 제공
<한겨레>는 훈련에 참여한 이들을 설문조사하고 일부를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기사에서는 모두 가명 처리) 1·2차 훈련에 참여한 총 84명 중 63명이 설문에 응답했는데 이 가운데 6명은 전화로 상황을 묻고, 2명은 방역수칙을 지켜 대면 인터뷰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설계원, 용접공 등으로 사내·사외 협력업체 7곳 소속이다. 설문 및 인터뷰 결과를 보면, 몇년간 만들어진 상흔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서른명이던 동료가 지금 열명도 안 돼요”(이세훈·26), “많을 때는 오십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열다섯?”(박민정) 등의 답변이 그것이다. “이것(훈련) 아니면 아마 회사가 당장 폐업할 상황”(민병훈·36)이었던 업체도 있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45.7살, 근속연한은 12.2년이다. 2018년 1명, 2019년 2명을 제외하면 60명 모두 2015년 이전에 조선업에 뛰어든 이들이다. “에지나. 정말 대단했다”고 박씨는 말했다. 2015년 입사하자마자 도면을 그린 첫 배를 그는 기억한다. 에지나는 2013년 삼성중공업이 30억달러(당시 환율로 3조4천억여원)로 수주한 세계 최대 에프피에스오(FPSO: 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다. 배관을 그렸다. 당시 박씨처럼 전공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단기간 교육을 받고 에지나의 설계를 맡았다. 박씨는 “그때는 날을 새우며 일할 만큼 일감이 많았다”고 했다. 그가 만든 에지나는 나이지리아 앞바다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지만, 그는 지금 거제에서 계속 발 붙이기가 힘겹다.
“바닥 중에 바닥이라니까요.”
1984년 고졸 신입공채로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한 이민규(56)씨는 훈련 성적이 좋아 현장이 아닌 사무실로 배치됐다. 설계원으로서 자부심이 있었고 1997년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시절에도 어려움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눈칫밥 먹지 말고 장사나 하자며 성실히 모은 돈으로 조선소 인근에 식당을 차린 게 2008년 금융위기 무렵이다. 그때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10년 전 “갈빗집을 때려치우고” 다시 돌아왔다. 금융위기 직후인데도 설계 일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5년여를 순탄하게 보냈다. 그런데 3년 전부터는 제때 월급을 받지 못했다. 2년 전 결국 회사를 나왔다. 현재의 직장에 다시 들어온 것은 9개월 만이다. 그런데 몇달 못 가 일감이 떨어졌다. 우선은 유급휴직을 해야 했다. 이번 훈련은 “무급휴직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회사의 권유로 참여했다. 대우조선해양에 남아 있는 정규직(직영) 동기들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래도 훈련이 있어서 한달 버틴다”며 “그렇게 따지고 보니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2015년을 기준으로 가계의 재정 상태를 물었다. 58명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그대로’라거나 ‘좋아졌다’고 답한 이는 각각 2명이다. 최근 2~3년 사이 수입은 얼마나 줄었을까? 63명 중 53명이 3분의 1 이상 줄었다고 했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 줄었다는 응답자가 8명이다. 2018년 설계 일을 시작한 3년차 이세훈씨는 “연차가 낮아 원래 급여와 최근 받은 급여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훈련 참여 직전까지 개인의 월수입을 물으니 50명이 ‘최저임금~300만원 이하’라고 답했다. ‘최저임금 이하’라고 답한 사람도 5명이 나왔다. ‘300만~400만원’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5명, ‘400만원 이상’은 1명이었다. 300만원 이상 벌었다는 6명 모두 50대로 경력 20년 이상이다. 이들은 훈련이 끝나면 수입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훈련에 참여하기 직전 모두 무급휴직에 들어갔거나 무급휴직 권고를 받은 상태였다. 이들이 직업훈련으로 받게 되는 ‘지역특화형 직업훈련 장려금’은 최저임금 150% 범위 내에서의 주휴수당을 포함한 인건비다. 5년차 이하 설계원이나 용접공의 월평균 수입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자리의 불안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 중 실직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25.8%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는 최소 수치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박민정씨처럼 남매 넷 중 셋이 실직을 경험한 경우 한 사례로 잡혔다. 50대 참여자인 민병훈씨는 자녀의 취업이 코로나19를 이유로 취소돼 실직자로 표기하지 않았다. 역시 50대인 이민규씨도 아들이 대학 졸업 전 취업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훈련 참여자의 평균 나이가 40대 중반이라는 점 자체로는 ‘기회’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주변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이직이나 퇴직이 예정돼 있지는 않은지 물었다. 그렇다고 답한 이는 4명에 불과했다. 이직 또는 퇴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물었다. 절반가량이 ‘코로나19 상황 등으로 조선업 외의 다른 직종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서’라고 답했다. ‘현재의 직종에 만족해서’라는 이는 10명이었다. ‘이직 준비를 못 해서’라는 응답자가 13명이었다.
고용 유지를 위한 훈련이니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훈련이 끝난 다음이다. 훈련이 마무리되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물었다. 이세훈씨는 “돌아가려고 보니 회사 단체 카톡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업무 지시나 현황 같은 걸 공유하기도 하는데, ‘일이 없어, 훈련받으러 간 사람들 돌아오면 큰일’이라는 문자가 올라오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일을 하고 싶다. 다른 일을 선택할 법한 20대지만, 일단 조선소 일을 더 하겠다는 생각이다. “한달짜리 훈련을 쭉 받으면서 출퇴근하니 방에서 퍼져 쉬지 않아 좋았다”고 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고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1월부터 유급휴가와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단기교육훈련을 반복하면서 2020년을 보냈다. 대리가 된 박민정씨도 마찬가지다. 훈련 참여자들 사정은 다들 비슷하다. 돌아가도 상황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응답자 62명 중 당장 호황기 상황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39명이고, 22명은 호황기로 돌아가려면 여러 해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경남 거제시에 위치한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에서 엘엔지(LNG)선 등이 건조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4분기에만 39억 달러(약 4조2천여억원)의 수주를 따내면서 불황의 늪에서 벗어날 채비를 갖췄다는 평가다. 거제/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지난해 해고자가 8천명이 넘는 것을 고려하면 그 100분의 1가량에 불과한 이번 훈련 참여자 수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한 면도 있다. 현장에서는 상생협약이 체결됐고, 고용 유지를 전제로 한 훈련이 두번째로 진행되지만 해고 또한 멈추지 않고 있다. “회사에서 (훈련 참여를) 한다고 합니까?” 지난 4일 수화기 너머로 김형수씨가 묻는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 지회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인원 감축의 급물살에 휩쓸렸다. 11월25일부터 대우 사내협력사 명천의 일방적 정리해고를 반대한다며 회사 동료와 함께 크레인에 올랐다. 이때 거제시가 중재에 나섰다. 당시 명천은 130여명 직원 대다수가 용접(탑재) 분야 숙련공이었다. 거제시가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은 숙련공 이탈을 막자는 뜻에서 출발한 상생협약의 첫번째 ‘맞춤’ 사례라는 이유도 있었다. 결국 회사의 추가적 인원 정리 방침은 철회됐지만, 지난해 가을 30여명이 결국 회사를 떠났다.
“상생요? 상생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ㅂ씨는 그날 새벽 6시 야근을 마치고 찾았던 회사 풍경을 생생히 기억했다. 12월16일 삼성중공업의 한 사내협력사는 아침 교육을 한다며 현장 노동자 100여명을 모이게 한 뒤 폐업을 선언했다. “폐업합니다. 귀가하세요.” 그리고 끝이었다. 선택지는 없었다. 같은 시기에 원청 안에서는 고용 유지를 위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독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다른 업체도 비슷한 시기에 폐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생이라는 말이 그는 “남의 나라 얘기 같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업황이 어려워지면서 급여는 몇년간 계속 줄어들었다. 그는 아이를 부모가 사는 다른 도시에 맡기고 야간근무를 주로 해왔다. 숙소에서 일어나면 독이 보인다. 곧 방을 비워야 한다. ㅂ씨는 “고등학교에 간 아이의 학비를 위해서라도 거제에 살고 싶었다”고 했다.
거제시가 고용 유지 제도로 보호하려고 했던 이는 바로 이런 ‘ㅂ씨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 거제시는 더욱 다급하다. 변광용 거제시장은 코로나19 확진자 추이가 진정되기 시작하면서 조선소 현장으로 나섰다. 12월은 코로나19 확진자가 거제에서 급증하면서 지역특화형 훈련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12월1일 47명이던 확진자가 한달 만에 163명으로 늘어난 탓이다. 시청 민원실이 차단되고, 조선소 현장 조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변 시장은 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2월 1차 훈련을 시범사업으로 진행했지만 코로나19가 현장에 들이닥쳤다. 훈련의 취지를 협력사나 그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며 “1월로 들어서면서 코로나19 확진 추세가 줄고 있다. 고용 유지 또한 또 다른 의미의 방역이라는 점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한 고용 보장 약속도 지키지 않는데요.”
강병재(56)씨가 오른 50m 높이 조명탑은 시베리아에서부터 불어왔다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그와 통화한 건 1월5일 소한이었다. 14일간 곡기를 끊은 노동자가 전화기 너머로 뱉는 문장 곳곳이 바람에 묻혔다. 그의 말을 끊지도 되묻지도 못했다. 202일째. 여름에서 가을을 지나 겨울이다. “아마 봄까지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가 일한 업체는 지난해 5월 적자를 이유로 폐업했다. 강씨를 비롯해 60여명이 시급제로 일해온 곳이다. 처음 고공농성에 들어갔던 5월 대우조선해양 협력사협의회는 해고될 9명을 다른 협력사로 수평이동시켜 고용을 보장하고, 기성금(원청으로부터 하청이 받는 도급비) 양도·양수를 통해 체불임금 및 국민연금 체납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땅을 밟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시 탑에 올랐다. 조명탑 주위로 친 비닐막은 바람을 온전히 막지 못한다. 통화를 더 이상 이어가기 힘들었다. “바람보다 불쑥 찾아오는 고립감이 더 무섭다”고 했다. 2011년부터 송전탑에서 크레인으로, 다시 조명탑으로 네번째 올라간 하늘이다. 강씨가 있는 독 조명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술교육원이 있다. 거기서 고용 유지를 위한 훈련이 이뤄진다. 강씨는 기자와 통화한 이튿날 사쪽과 논의를 한 뒤 조명탑에서 내려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고용승계’ 펼침막이 보이는 대우조선소 조명탑에서 사내협력사 노동자 강병재씨가 농성 중이다. 그는 농성 203일째인 지난 6일 내려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금속노조 제공
고용과 관련해 하청업체와의 약속이 번번이 깨져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노동계는 원청(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경남지부 조선하청조직사업부장은 “원청이 인력 감축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한 지금 시행하는 모든 고용 유지 대책이 효과를 보기 어렵다. 사내협력사 전체가 사실상 인력공급업체의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굳이 원청의 뜻을 거스를 이유도 없고, 일부라도 지급(훈련 참여자 1명당 20만원 내외)할 유인은 더더욱 없다”고 했다. 실제로 △원청의 업무 지시가 이뤄지고 있는 점 △임금 기준 등이 원청 업체 주도 아래 재조정되는 점 △원청의 작업 공간, 기계와 시설 이용 등을 고려하면 사내하청의 인력공급업체화는 현실에 가깝다. 김중희 거제시 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사무국장도 “거제시가 야심차게 준비한 건 인정할 만한 대목이지만, 일단 원청이 인력을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결정적일 것”이라고 했다. 김 국장은 “(10월과 비교해) 상생협약이 체결된 11월에만 925명이 줄었다. 이는 고용 유지 약속을 해놓고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며 “원청이 11월 협약 이후 인위적 구조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만 분명히 해도 지금 해고 추세는 진정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변 시장은 “공감한다”고 했다. 그는 5일 대우조선소를 찾았다. 이성근 대우조선해양 대표이사, 김돌평 협력사협의회장, 신상기 대우조선노조지회장 등을 만났다. 변 시장은 “어제 현장을 돌아보니 실제로 회사에서 떠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시는 거제형 고용 유지 모델로 1년 정도 기간 동안 6천명의 해고를 막아보려는 뜻은 접지 않았다”고 했다. 8일에는 삼성중공업 쪽 관계자들을 만났다. 조선소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용 유지에 더 의지를 갖고 참여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대우, 삼성 대표이사, 협력사 대표 등 조선소 대표자들과 코로나19 상황이지만 숙련노동자를 지켜야 한다는 데에 공감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공감은 지난해 11월 상생협약처럼 구속력이 없다. 시에서는 시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고용 유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 중이다.
김돌평 협력사협의회장은 7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우리 회사도 2차 훈련에 10명을 보냈다. 대우 안에 100여개 협력사가 있는데 순차적으로 보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며 “사람을 줄이면 숙련공이 빠진다. 숙련공들의 생계도 문제지만, 결국 불황이 지나고 나면 업체에도 인력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일단 코로나19가 지날 때까지는 함께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협력사 대표들이 (원청의) 물량을 보고 어느 정도 참여시킬 것인지 조율 중이며 8일까지 신청을 1차로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또 “협력사 차원에서 현재의 기술교육원 이외에도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최대 1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김 회장 말대로라면 대우에서만 거제시가 제시한 목표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
실효성을 의심하는 쪽 또한 모두 고용 유지 필요성, 거제시가 실험에 대해 갖는 진정성은 전적으로 공감한다. 김중희 국장은 “6천명이 아니라 1천명만 (해고를) 막아도 (고용 유지를 위한) 훈련은 의미가 크다. 현재도 (수주잔량을 위해) 항시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필요하다”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 참여 주체가 진정성을 보이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제도가 시작된 만큼 이제는 훈련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따져보며 가야 한다. 그래야 고용 유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숙련노동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단계까지 성공적으로 이를 수 있다”며 “이와는 별개로 (고용 유지에) 동참하는 원·하청에는 좀 더 적극적인 지원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배 원장은 특히 숙련노동을 강조했다. “최근 조선업계의 수주 실적을 보면 앞으로 2년 안에 다시 숙련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지금 인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과거 구조조정 뒤 인력 부족을 경험한 일본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며 “현재의 어려움을 완충하면서 숙련을 통해 노동자도 기업도 제때 이득을 볼 수 있어 일거양득이 될 수 있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현재 바라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설문의 끝 문항, 주관식이었다. “양질의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1년차부터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해결이 될까요?”라고 되묻는 15년차, “계속적으로 교육이 진행됐으면 합니다”라는 40년차까지 노동자들의 속내가 담겼다. 대기업 정규직과의 차별, 52시간제, 최저임금제, 상여금 등 오래 묵은 노동계의 이슈가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드러났다.
“가족을 굶길까 겁이 납니다.”
과거 노조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는 25년차 용접공은 설문의 마지막 문항에 이렇게 썼다. 그는 2015년부터 5년 동안 일방적으로 급여를 삭감당했다. 뜯겨나가다 보니 어느새 3분의 1이 줄었다. 가족 중 한명은 코로나19를 버티지 못하고 실직했다. 그래도 그는 “결국 (해고되더라도) 거제에서 같은 일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2~3년 안에는 세계 1위 시절 같은 호황은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은 희망이기도 했다.
거제/하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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