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 사무실에서 정혜승 얼룩소 대표(가운데)와 멤버들이 일하는 모습.
지난주 에스엔에스(SNS)나 언론계에서 꽤 공유되며 논쟁 대상이 된 글이 있다.
미디어스타트업 ‘얼룩소’가 내보낸 ‘계급이 돌아왔다–이대남현상이라는 착시’와 ‘누가 페미니스트인가’이다.
<시사인>에서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를 썼던 천관율 얼룩소 에디터가 올해 2000명을 대상으로 한국리서치가 두차례 실시한 웹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한 이번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각각 이렇다. 하나, ‘이대남 현상’은 실제론 상층 청년 남성들이 주도하는 현상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20대에 존재하는 심각한 계급 격차다. 둘, 페미니즘 성향이 강할수록 민주적 시민성·시민적 권리의식·정치 효능감이 모두 높아지는 관계를 보였으며 20대 여성의 페미니즘 결집 이전에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결집이 먼저 있었다.
‘통념을 뒤집은 실증적 조사와 스토리텔링’이라는 평가부터 ‘새롭지 않은 상식적 결과’라거나 ‘사회과학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까지 반응은 다양하다. 하지만 진지하고 깊이 있는 기사를 둘러싼 논란 자체가 요즘 언론계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란 점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두 이슈에 대해 대선 주자들의 발언은 실시간으로 전하면서도 그 실체에 대해 독자적 분석을 시도하는 언론은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얼룩소는 이재웅 전 쏘카 대표가 투자하고 정혜승 전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이 대표를 맡았다는 점과 일간지 등 현직기자들의 합류, 글을 올린 이용자에 매일 보상 지급 등으로 먼저 화제가 된 터였다. 궁금해졌다. 이들이 내세운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는 미디어’의 정체가.
“매체도 아니고, 창간도 아니고….” 서울 성수동 소셜벤처 공유오피스인 ‘카우앤독’ 건물 사무실에서 만난 정혜승 대표의 말마따나 얼룩소의 정체성은 기존 구분법으론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아니, 이들 스스로도 ‘집단지성을 통한 공론장 실험’이라는 목표 이외엔 모든 것이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중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언론의 시작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이 창간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대엔 기술의 발달과 함께 본격적으로 분야를 특화한 미디어 스타트업들이 등장했다. 연예·오락 분야나 연성 콘텐츠 업체도 많지만, 슬로우뉴스(2012 설립), 아웃스탠딩(2015), 닷페이스(2016), 뉴닉(2019) 등 이른바 ‘경성 뉴스’를 자신의 시각과 방식으로 전하는 곳들이 영역을 확장 중이다.
2021년 베타서비스를 시작한 얼룩소는 뭐가 다를까. 이들은 이번 천관율 에디터의 기사 같은 오리지널 콘텐츠에 앞서 공론장 실험에 집중했다. 9월30일 시민들 글을 모집하는 10주짜리 얼룩소 프로젝트가 내건 44개 토픽을 보면 ‘요즘 어디에 꽂혔어요?’도 있지만 ‘한국 언론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할까요?’ ‘불평등을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처럼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많다. 동영상이나 짤, 뉴스레터 등을 내세운 다른 스타트업에 비하면 글 위주인데다 사회 이슈를 망라한 얼룩소는 ‘고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대선을 앞두고도 왜 언론들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시한 대선이 되지 않도록 우리끼리 실컷 떠들어보자는 취지”라고 정 대표는 말했다.
지난 3월 데이터를 기반으로 쓴 글을 대상으로 실시한 ‘쏘프라이즈’에 이어 얼룩소 프로젝트 또한 ‘보상’을 내걸었다. 50자 이상 글을 쓰거나 답글을 남겨 이용자인 얼룩커들의 ‘좋아요’를 3개 이상 받은 하루 100명에게 1만원씩 준다. 에디터들이 고른 ‘에디터픽’이 되면 메인 화면에 소개되며 20만원을 받는 식이다. 마케팅 광고비를 오롯이 보상금액으로 쓰는 이유는 “미디어 생태계가 지속가능하려면 좋은 글에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용자들의 ‘좋아요’와 에디터 픽은 다른 경우가 많다. 얼룩소는 ‘서로 다른 시각을 나누기 위해’ 이용자의 글만이 아니라 에디터들의 모더레이션(조정)과 에디터들의 오리지널 콘텐츠, 그리고 제대로 된 토의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포털에서도 좋은 기사를 더욱 보기 힘들게 된 게 알고리즘 도입 이후라는 지적이 적잖은 요즘이다. 정 대표는 “포털 댓글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처럼 거칠거나 증오의 방식이 아니라, 데이터를 근거로 예의를 갖춰 서로 다른 시각을 말하고 듣다 보면 접점이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안전한 공론장’을 위해 혐오와 차별 없는 대화 등 몇가지 규칙을 정하고 이에 어긋나는 글은 ‘가차 없이’ 지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얼룩소가 이대남현상과 페미니즘에 대해 분석하며 내보낸 기사들의 머리 이미지. 누리집 캡처
구성원이 20명을 훌쩍 넘는 얼룩소는 데이터팀, 에디터팀, 플랫폼팀 등 체계적 조직에 쾌적한 임대 사무공간도 갖추고 있다. 다음 창업자인 이재웅 전 대표의 투자 덕인 건 사실이다.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이 많음을 숨기지 않는 ‘어 룩 앳 소사이어티(A look at society)’에서 따온 이름 얼룩소도 이 전 대표와의 대화 중 나온 아이디어다. 다만 이들에겐 이 전 대표 역시 자신들처럼 ‘각자 가진 재능을 내놓은 한 사람’이다. 정 대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지속가능하려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정성과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 또한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대선 이후로 계획 중인 본서비스를 내다보며 수익에 초점을 맞춘 비즈니스 모델을 세우고 또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 하는 것도 과제다.
사실 공론장은 대부분 언론사가 추구하는 바다. 그런데 잘 작동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인(IN)’과 다음 ‘아고라’의 원조가 <한겨레>가 한때 서비스했던 ‘디비딕’과 ‘한토마’였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이야기다. 이용자와의 소통엔 익숙하지 못하고, 소수 훈련된 기자들에 의존하는 관행도 전통 언론엔 깊다. 테크 미디어기업인 퍼블리시의 김위근 최고연구책임자는 “전통 미디어들은 대체로 방향과 그에 따른 자원분배가 정해져 있다. 실험이 쉽지 않다”며 “기존 언론사가 잘 이해 못 하는 보상시스템, 그리고 기술과의 결합이 앞으로 미디어업계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플랫폼을 지향하는 미디어가 더 확장성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얼룩소는 미디어와 플랫폼 사이 위치한 모양새다. 천관율 에디터는 “집단지성이라는 말에 다들 시큰둥해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의견들이 좋은 생산구조를 갖추면 좋은 전문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다만 많이 모이는 것만으론 안 된다. 성공확률이 낮다고 하겠지만 위키피디아나 리눅스처럼 미디어 판에서도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질서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주 얼룩커와 얼룩소 사이 깊은 분석과 대답이 신속히 오가는 모습은 그런 과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대남에 대한 분석과 달리 페미니스트 기사가 착시일 가능성’을 제기한 한 이용자 글에 데이터팀은 다음날 세부 통계를 공개하며 분석 과정의 고민을 답글로 올렸다. 해당 이용자는 데이터팀의 답에서 새롭게 분석해볼 만한 또 다른 포인트를 찾아냈다.
얼룩소는 10주가 끝나는 내달 또 어떤 프로젝트가 나올지 “자신들도 모른다”고 말한다. ‘다른’ 공론장은 진행형이다. 글·사진 김영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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