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러분이 웃고 울었던 현장에 <한겨레> 사진기자들도 있었습니다. 한 해를 끝자락까지 그 마음에 남은 사진 한 장들을 모았습니다.
새해에도 우리 사회와 사람들의 마음을 잇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며 `2021년 마음 한 장'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묶어 소개합니다.
#8 그는 ‘지옥’에 갔을까?
12·12 군사쿠데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의 주검이 11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빈소인 세브란스병원으로 가기 위해 운구차로 옮겨진 뒤 아들인 전재용(맨 오른쪽)씨가 인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그는 `지옥'에 갔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을 본 뒤 문득 든 생각입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교 1학년 봄 무렵이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시절 대학 캠퍼스는 희뿌연 최루탄 연기가 늘 가시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5월에 들어서자 학생들의 시위는 나날이 격화되어 갔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5주기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저녁, 총학생회가 학생회관 안에 있는 대형 식당 한쪽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상영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온 그 독일 방송기자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의 보도 다큐멘터리일 뿐이었지만, 당시 이런 영상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안기관에 잡혀가던 시절이라 학생들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시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질도 음향도 좋지 않았지만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비디오가 상영되자 식당 안에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어느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느낀 충격과 공포란 대학 새내기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전두환이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더욱 안타깝고 나 자신도 놀란 사실은 비디오를 보기 전까지 5.18의 참상을 까마득히 몰랐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이후 전두환이라는 이름은 늘 가슴 한쪽에 상처로 남았습니다.
1988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1995년 12월 검찰의 12·12와 5·18 사건에 대한 전면 재수사에 반발해 이른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지만, 하루 만에 압송돼 구속됐고 법원에서 내란죄 등으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때 기자는 골목 성명부터 합천 고향 집과 서울구치소까지 1박 2일을 꼬박 동행 취재했습니다. 전씨 고향 집에서는 이웃집 담벼락에 올라 밤새워 서서 상황을 지켜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어찌 된 일인지 전두환은 사면 복권으로 법적인 명예를 회복한 채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2017년에는 양민학살이나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을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덩달아 국우세력은 ‘북한 특수부대 침투설’ 등을 퍼뜨리며 5·18에 대한 심각한 폄훼와 왜곡들을 저지르고, 제1야당인 국민의힘에서조차 5·18정신을 왜곡하는 일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끝내 사과와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망언과 대립을 끝내고 ‘올바른 역사 인식’이 국민 속에 자리 잡을 기회가 사라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에 대한 진정한 역사의 단죄는 5·18 민주화운동 정신이 헌법 전문에 담기고 더는 왜곡되거나 폄훼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결식 뒤 전씨의 유해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서 떠돌고 있을까요?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9 마음의 빚
보성역 승강장에서 한 노부부가 화순에 있는 병원에 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부는 두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간다. 서울로 한 번에 가는 무궁화호가 없어져 여간 힘든 게 아니라며 한탄했다. 보성/백소아 기자
“여보세요?”
“보성역에서 사진 찍은 그 선상님 맞아요?”
11월 어느 날 오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단번에 누구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9월 보성역에 뵌 어르신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서울 병원에 가기 위해 새벽 일찍 기차를 타러 나오셨던 모습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사진 찍게 해주셔서 신문 잘 만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꼭 한 번 전화하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하신다는 어르신께 늦은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때 기차를 타시느라 제 명함만 드렸을 뿐 성함도, 연락처도 제대로 여쭙지 못했습니다. 취재에 필요한 질문만 꺼내다가 정작 중요한 걸 여쭤보지 못한겁니다. 그 명함을 가지고 계시다가 문득 생각이 나셨는지 전화를 하신 겁니다. 돌이켜보면 참 부족하고 못난 기자입니다.
“기차가 하루에 세 대 밖에 없고, 광주송정역까지 가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2만 얼마면 서울 가는 기차 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송정까지 가서 4만 얼마 내야하고…. 나는 눈이 안 보이고, 집사람은 다리도 아프고 신장도 안 좋아서 서울 큰 병원에 가야 되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나 봐요.”
바뀌지 않는 어려움을 호소하시는 어르신께 “좋은 소식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라선에 열차편이 추가될 예정이기는 하나 어르신이 필요로 하는 작은 역을 지나는 무궁화호가 아니라, 수서고속철도(SRT)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차 조심하고, 건강하게 지내요.” 마지막까지 상대방의 안녕을 살피는 어르신의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마음이 찡했습니다.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항상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을 느낍니다. 눈 내리던 서울역에서, 무더운 선별 진료소 앞에서, 새벽안개 자욱한 기차역에서 그저 눈앞에 보인 것을 잘 담아낸 것입니다. 자신의 겨울옷을 벗어서 노숙인에게 건네고, 자신의 업무와 코로나 파견업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함께 발을 내딛는 건 사진 속 주인공들입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신문에 쓸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올 한 해에도 많은 분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10 비행기가 거꾸로 매달린 사연은
성추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고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가 11월 18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1인시위를 시작했다. 이씨의 옷깃에 딸이 생전에 임관하면서 공군으로부터 받은 공군배지를 거꾸로 달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성추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고 이예람 중사의 아버지가 지난달 18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이 중사의 아버지는 “대통령이 내 딸의 분향소까지 직접 찾아오고 최고 상급자까지 엄정 수사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민간 자문기구인 군수사심의위원회는 공군법무실장 등에 대해 불기소 권고를 내리고 군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심의위 제도를 방패막이 삼아 부실수사로 이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중사의 아버지는 또 “군의 제 식구 감싸기 부실수사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며 군 최고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쌀쌀한 날씨 속에 고인이 된 이 중사의 사진을 목에 걸고 나온 이 씨는 외투 옷깃에 비행기 모양의 배지를 거꾸로 달고 있었다.
“이 배지는 딸이 임관하면서 공군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거꾸로 가는 군의 실상을 알리고 싶어 비행기의 머리가 아래로 가도록 달고 이 자리에 섰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자식이 군 복무 중에 죽었음에도 군에서 누구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했다”고 말한 이 씨는 죽은 딸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아비로서 이 자리에서 계속 1인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