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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전쟁·독재 ‘격랑의 시대’ 겪어내고 ‘참교육’ 지지해주셨죠”

등록 2022-05-01 11:52수정 2022-05-01 18:46

[축하합니다] 고 하철수님에게 올리는 아들의 글
필자의 부친 하철수(맨왼쪽)씨는 1950년 국립해양대 6기생 출신이다. 하성환 주주통신원 제공
필자의 부친 하철수(맨왼쪽)씨는 1950년 국립해양대 6기생 출신이다. 하성환 주주통신원 제공
아버지는 1930 년 전북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 어머니 고향인 임실군 관촌면과 달리 삼계면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오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 1970 년대에야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한 곳이니 도로 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아버지는 어린 시절 도깨비불을 보면서 산길을 걸어 다니셨다고 회고했다 .

1990년대초 할아버지 묘소를 비롯해 선산이 있는 삼계면에 갈 때면 큰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 그때마다 큰할아버지는 사람을 피해 방구석 저쪽으로 몸을 숨기셨다 . 일제 때 탄광으로 끌려가 고된 노동과 매질을 당한 후유증이었다 . 큰할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 아버지께서 ‘가미카제 특공대’로 길러지는 소년비행단에 들어간 ‘덕분’이었다 .

해방 이후 1950 년 3 월 전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입시험을 보려던 아버지는 창문을 두드리는 담임 선생님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 국립 해양대 합격 소식을 전하려고 일부러 서울까지 오셨던 것이다 . 그길로 등록금 없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용돈까지 주는 해양대 6기생으로 입학했다 .

지난 2000년 부친 하철수씨 칠순 때 찍은 가족 사진이다. 뒷줄 왼쪽 시계방향으로 큰아들인 필자, 둘째아들, 둘째딸, 맏딸 부부. 하성환 주주통신원 제공
지난 2000년 부친 하철수씨 칠순 때 찍은 가족 사진이다. 뒷줄 왼쪽 시계방향으로 큰아들인 필자, 둘째아들, 둘째딸, 맏딸 부부. 하성환 주주통신원 제공
그런데 그해 입학 직후 한국전쟁 이 터졌다 . 아버지는 인민군 의용군 소대장으로 징집돼 훈련을 받았다 . 어느 날 눈이 충혈 되자 의용군 중대장이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 그런데 가는 도중 중대장은 차를 세워 내려주며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 전주 북중학교 동기동창이었던 그 중대장은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훗날 오수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했다 . 고향 오수역을 지날 때면 아버지는 자신을 살려 준 그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

그때 아버지는 전주 한옥마을 전동성당 안에 며칠 숨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앞마당에 땅굴을 파고 석달 가까이 은신했다 . 그런 어느 날 완장을 찬 내무서원이 찾아왔다 . 소총을 들이대며 땅굴 입구를 쏘아보면서 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 그 역시 전주 북중학교 친구였다. 석 달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있던 아버 지는 폐병에 결려 요양 중이라고 둘러댔다 . 그 친구는 뒤로 주춤거렸고 그렇게 또 한번 생사의 위기를 넘겼다 .

전쟁이 끝나 해양대에 복학한 아버지는 선배 3 기생들의 수난사를 전해 들었다 . 전쟁이 터져 군산에서 부산으로 캠퍼스 이전 과정에서 3 기생 일부는 빨갱이로 몰려 영도 동삼동 앞바다에서 학살· 수장됐다고 했다 . 그래서 2 기생 선배의 아내는 그 이후 갈치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 실제로 전쟁 직후 동삼동 미니공원 절벽에선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채 수장됐다 . 이른바 ‘ 보도연맹학살 ’ 사건이다 . 부산에서만 수천 명에 이른다고 했다 .

아버지는 해양대 동기들과 달리 군함선의 기관장을 하지 않고 육지 근무를 택했다 . 해사고교에서 수학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일화가 있다 . 그 시절엔 수업료를 내지 않은 학생들에게 교사들이 체벌을 가했다 . 아버지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수업료를 내주셨고 그 제자는 선장이 되어 나이 50 이 다 될 때까지 은사님을 찾아오곤 했다 . 교사 생활을 그만 둔 뒤 1957 년 해운국 ( 항만관리청 ) 에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는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두 차례 억울하게 옥고도 치렀다 . 모두 무죄로 풀려나 항만관리청에 복귀했지만 절대권력의 부패상에 몸서리치셨다 .

아버지는 시대의 격랑 속에 살아온 탓인지 대학생이 된 아들이 데모하는 걸 두려워하셨다 . 1987 년 6 월 항쟁 땐 아버지와 격렬하게 언쟁을 벌인 적도 있다 .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독백하듯 내게 고백하셨다 . “ 지나고 보면 젊은 너희들이 하는 게 옳았다 . 우리 나이 든 세대가 어서 사라져야 좀 더 좋은 세상이 오지 않겠냐 ?” 1989 년 전교조 창립 때 아버지는 내 선택을 지지하고 믿음과 격려까지 해주셨다 . “ 학교가 변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 지난 1 월 22 일은 2005년 별세하신 아버지 기일이었다 . 하늘에서도 여전히 이 아들을 믿고 격려해주시겠지요?

하성환 주주통신원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에 이르렀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원고료를 드립니다-<한겨레>가 어언 35살 청년기에 이르렀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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