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방송>(KBS) 사옥. 한국방송 제공
대통령실이 티브이 수신료 분리 징수에 관한 여론을 듣겠다고 나선 뒤, 정치권과 언론단체를 중심으로 수신료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여당은 수신료를 재원으로 삼는 <한국방송>(KBS)의 정파성 등을 이유로 들어 연일 수신료 분리 징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야당과 언론단체는 “정부와 여당이 수신료를 볼모로 공영방송 압박에 나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티브이 수신료를 정권 차원의 ‘방송 길들이기’ 수단으로 삼는다는 논란이 또다시 되살아나는 모양새다. 티브이 수신료 납부 및 통합 징수 제도가 자리 잡게 된 역사적 맥락과 주요 쟁점을 짚어봤다.
■ 수신료 분리 징수 여론 띄우는 정부·여당
대통령실과 여당의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은 수신료 납부를 ‘선택의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티브이를 볼 수도 있고 안 볼 수도 있는데, 전기요금에 수신료를 끼워서 징수하는 것은 ‘납부 선택권’을 침해한다는 논리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국민제안’ 누리집에 올린 ‘TV 수신료 징수방식 개선’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수신료 통합 징수를 둘러싸고, 소비자 선택권 및 수신료 납부거부권 행사가 제한된다는 지적 등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중략) 특히, 전기요금과 함께 부과되는 현행 징수방식은 시대에 맞지 않고, 시청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어 대통령실은 “최근 대부분 가정에서 별도 요금을 내고 아이피티브이(IPTV)에 가입해서 시청하거나 넷플릭스 같은 오티티(OTT)를 시청하는데, 전기요금 항목에 의무적으로 수신료를 납부하는 방식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통령실 국민제안을 통해 제기됐다”고 강조한 뒤 ‘수신료 징수방식 개선’에 대한 의견을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형식적으로는 시청료 징수방식에 관한 의견을 듣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현행 통합 징수방식이 시청자의 납부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일부의 주장을 거듭 적어놓은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실이 갑자기 수신료 징수방식 관련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나선 건 “(한국방송을) 보지도 않는 국민이 강제로 수신료를 내는 게 맞느냐”는 윤 대통령의 문제의식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여당은 좀 더 직설적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여당 간사인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14일 오전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현행 수신료 징수방식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전하며 “케이비에스(KBS)는 내부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데 지금 당장 내부에서 혁신하지 않는다면 수신료 분리 징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미디어특별위원회는 현 정부 출범 초기인 지난해 7월 “케이비에스가 공정하게 제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들만 수신료를 내게 하는 ‘수신료 자율납부’를 포함해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대통령실은 지난 9일 ‘국민제안’ 누리집을 통해 티브이 수신료 징수방식에 대한 여론 수렴에 나섰다. 국민제안 누리집 갈무리
■ ‘티브이 보는 사람만 내는 수신료’는 없다
물론 티브이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걷는 현행 징수방식이나 수신료 자체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일정하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실과 여당이 일부 여론에 편승해 마치 방송 시청 여부 등에 따라 수신료를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수신료에 관한 지금까지의 사회적 합의, 관련 법 취지와 주요 판례를 거스르는 발언이다.
티브이 수신료는 한국방송이 국영방송이던 1963년 ‘시청료’ 100원으로 출발해 1981년 4월 컬러티브이 2500원, 흑백티브이 800원(1984년 면제)으로 오른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수신료는 도입 초기부터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지상파 티브이 난시청 문제와 한국방송의 정권 편향 보도에 대한 불만이 주된 원인이었다. 수신료 납부 대상을 아예 법으로 못박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방송법에서는 ‘티브이를 보는 사람’이나 ‘납부를 희망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티브이 소지자’라면 누구나 수신료를 내도록 하고 있다.
방송법 64조(텔레비전수상기의 등록과 수신료 납부) 텔레비전방송을 수신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수상기를 소지한 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공사에 그 수상기를 등록하고 텔레비전방송수신료를 납부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수상기에 대하여는 그 등록을 면제하거나 수신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감면할 수 있다.
수신료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은 1999년 5월 헌법재판소다. 당시 헌재는 수신료 납부 의무를 규정한 법령(당시에는 한국방송공사법)의 위헌을 주장하며 제기된 헌법소원과 관련해 “수신료는 한국방송공사의 원칙적인 재원으로서 공사가 방송의 자유를 실현함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중요한 사항”이라며, 이를 실제 방송 시청 여부와 관계없이 부과되는 ‘특별부담금’이라고 적시했다. “수신료는 공영방송 사업이라는 특정한 공익사업의 소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으로서, 재정수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세’와 다르고 서비스의 대가로 지불하는 ‘수수료’도 아니라는 것이다.
■ 법원 “통합 징수의 사회적 이익 더 커”
여권이 문제 삼는 수신료 통합 징수 제도는 김영삼 정부 시기였던 1994년 10월 처음 도입됐다. 그 전까지 한국방송은 ‘징수원’을 두고 직접 수신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비용은 많이 들고 일부 시청자의 납부 회피 등으로 징수율은 떨어졌다.
이에 정부가 ‘수신료를 보다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징수하기 위해’ 한국전력 위탁 징수제도를 도입한 뒤, 납부거부는 눈에 띄게 줄었다. 한국방송은 지난 10일 낸 수신료 설명자료에서 “한전 위탁 징수 이전, 등록된 수상기 중 53% 정도만 수신료를 내고 그 돈의 약 36%는 비용으로 나가던 상황이 크게 개선되어 현재는 납부율 약 99%, 비용률 약 10%의 효율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신료 통합 징수제도를 둘러싼 논란은 2003년 10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수신료 분리 징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내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한나라당이 내세운 명분은 그때도 ‘시청자의 선택권 보장’과 ‘공영방송의 공공성 강화’였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수신료 분리 징수 시도는 여당과 언론·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관련 소송도 여러 건 제기됐다. 대표적으로 2008년 7월 신아무개씨 등은 서울행정법원에 방송 수신료 통합 징수 권한 부존재 확인 소송을 냈으나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패소했다. 공평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통합 징수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통합 징수로 재산권의 제한이 일부 발생한다 해도 효율적인 수신료 징수를 통해 얻는 사회적 이익이 더 크다는 것이 판결 취지였다.
방송법 시행령 43조 2항에 의한 통합 고지, 징수는 공영방송의 유지·발전을 위해 수신료를 보다 효율적이고 공평하게 징수하기 위한 것으로서 실제로 위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보다 징수율이 현저히 향상되고 징수 비용은 절감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목적의 정당성 및 방법의 적정성이 인정된다.(서울행정법원, 2009년 1월8일)
■ “분리 징수, 공영방송 재원 통제 발상”
야당과 언론단체가 정부·여당의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시청자의 선택권 보장이나 공영방송 정상화라는 명분 뒤에 ‘방송 길들이기’라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신료 분리 징수가 실제로 시행되면 과거 통합 징수 이전처럼 수신료 징수 비용은 높아지고 징수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전체 재원의 47.3%(2020년 기준)를 수신료에 의존하는 한국방송으로서는 심각한 경영 압박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실이 수신료 분리 징수에 관한 의견 수렴에 나선 9일, 보수 성향 ‘한국방송 노동조합’은 곧바로 성명으로 김의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통령실의 수신료 분리 징수 추진을 “공영방송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비상사태”로 규정하면서도, 이를 추진하는 정부·여당이 아닌 한국방송 경영진을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의 한국방송을 ‘민노총(민주노총) 노영방송’으로 만든 현 경영진이 물러나야 한국방송과 수신료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이는 여당 소속 박성중 의원 등이 줄곧 ‘수신료 분리 징수’를 “민노총(민주노총) 언론노조가 장악한 케이비에스 편파방송 해결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여당이 공영방송의 재원 구조에 대한 어떠한 정책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여론을 앞세워 수신료 분리 징수 혹은 납부 거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영방송을 보지 않는 사람은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발상은 재원을 통제함으로써 공영방송의 공적 기능 확대를 틀어막고 정치적 유불리라는 모호한 잣대로 공영방송을 정쟁의 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선동”이라고 비판했다.
국회 과방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같은 날 성명을 내고 “법원에서도 (수신료) 통합 징수가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대통령실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정권의 공영방송 흔들기가 엠비시(MBC)에 이어 이제는 케이비에스 차례인 듯하다”고 지적했다.
최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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