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5월 ‘양김씨’ 주도로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을 결성해 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해빙기를 열었다. 사진은 85년 2월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고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3월 18일 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환영식에서 김영삼(오른쪽) 공동의장과 나란히 자리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8)
1984년 정치권 역시 4년 만에 동면에서 깨어나 ‘정치적 경칩’을 맞았다. 김영삼·김대중 ‘양김씨’가 주도했다.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은 박형규 목사, 고 이돈명 변호사를 통해 서울의 김영삼과 협의해 그해 5월18일 김영삼을 공동의장, 김상현을 공동의장 대행으로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발족시켰다. 앞서 80년 ‘5·17 쿠데타’ 때부터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은 83년 5월 23일간 단식투쟁 끝에 연금에서 풀려났다.
민추협 결성은 85년 2월12일 12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양김씨가 정치생명을 걸고 친 배수진이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대통령 7년 단임제’를 공약한 만큼, 87년 이후 ‘포스트 전두환’ 시대를 염두에 둔 포석이기도 했다.
민추협은 상도동계(김영삼)와 동교동계(김대중)가 ‘5 대 5’ 지분으로 철저히 양분한 기묘한 조직이었으나, 그동안 정치규제에 묶여 정치휴업을 강제당했던 정치인들, 새로운 정치지망생들이 몰려들면서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전두환 제2중대” 유치송의 민한당은 인기가 폭락했다.
양김씨는 85년 1월18일 부랴부랴 ‘신한민주당’을 창당했고, 김대중은 총선 나흘 전인 2월8일 드디어 귀국했다. 신민당은 ‘양김씨’를 비롯한 14명의 수뇌부가 출마 금지된 상태에서 창당 25일 만에 치른 ‘2·12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어 파란을 일으켰다. 총선 결과 전체 260석 가운데 민정당이 148석(지역구 87, 전국구 61), 신민당이 67석(지역구 50, 전국구 17), 민한당이 35석, 국민당이 20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서울·부산·광주·인천·대전 등 5대 도시에서 전원 당선되었고, 득표율에서도 민정당 32% 대 신민당 29%로 백중세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신민당이 득표율 43%로 민정당을 16%포인트나 앞섰다. 민한당 의원들까지 옮겨오면서 신민당은 102석의 제1야당이 되었다.
화려하게 복귀한 ‘양김씨’는 민추협 창립 1돌 기념식에서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민주주의를 지연시키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회복을 위한 법적 제도적 조치, 즉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 전면적인 지방자치 실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헌법에로의 개정, 양심수 석방과 정치사범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 복권, 학원 민주화, 노동자와 농민의 자유로운 활동과 권익 보장’을 요구했다.
‘2·12 총선 승리’는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애초 총선을 앞두고 84년 가을부터 학생운동, 청년운동 등 민주화운동 일각에서 선거 거부론이 제기되면서 대논쟁이 벌어졌다. 60년 4월혁명을 선도한 학생세력은 이후 19세기적 앙시앵 레짐의 이승만 체제를 극복할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 장면 정권의 무능과 보수성을 보았으며, 79년 ‘10·26’ 직후에도 유신체제 청산보다는 ‘포스트 박정희’의 권력잡기에만 몰두한 양김씨를 비롯한 기성 정치권이 ‘전두환 쿠데타’를 불러온 요인의 하나로 비판했다. 게다가 전두환 파시즘 체제 아래에서 선거 참여가 자칫 ‘가짜 민주주의’에 들러리만 서게 될 뿐이라는 우려도 강하게 작용했다. 반면 선거 활용론자들은 “선거제도는 대중의 치열한 민주주의 투쟁의 공간이라는 점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청련에서도 초기에는 “부르주아 운동 하려고 민청련 만들었나?”라는 논리가 우세해 선거 보이콧을 결의했다. 그러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려던 민청학련 출신의 이호웅은 여러 만류로 포기했지만, 설훈은 일관되게 “정치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 이철을 출마시키고 자신은 그 선거 사무장을 맡았다. 이런저런 곡절 끝에 민청련은 선거 활용론으로 선회했다. 선거 과정에서 정치선전이 어느 때보다 자유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에서도 처음에는 “정치권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에서 농어민이 욕하는 농어업 정책에 적극적인 정당과 인물을 지지하겠다고 나서자 노선을 바꾸었다. ‘민민협’과 ‘국민회의’에 참여한 곳곳의 지역 운동단체들도 “선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언론단체인 ‘언협’은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나는 평소 개인적으로 “선거 없는 시민민주주의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란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말’로 문제를 풀어가는 사회인데, 선거는 말로 하는 정치”이기 때문이었다.
‘2·12 총선 승리’는 80년대 중반 한국 민주화운동의 초점을 ‘국민의 주권성·대표성·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선거를 따내자’는 개헌 투쟁으로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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