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8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에서 '고대영 사장 퇴진 투쟁 선포식'을 열어 고 사장 퇴진과 이사회 해체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국방송>(KBS) 구성원들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아온 고대영 사장이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전제로 거취를 표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이인호 이사장도 9일 방송법 개정을 퇴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한국방송> 양대 노조의 한 축인 <한국방송> 노조는 이를 근거로 10일 0시부터 파업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지만, 이번 정기국회에서 방송법 개정이 쉽지 않은 만큼 사장과 이사장의 ‘조건부 사퇴’는 사실상 임기를 계속하겠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인호 이사장은 9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정권에 따라) 사장을 자꾸 교체하는 것이 방송을 망친 원인 중 하나”라며 “방송법이 개정되면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고 사장과 이 이사장이 ‘사퇴’라는 표현을 입에 올린 건 처음이지만 이는 전향적인 거취표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임기를 이어가겠다는 뜻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단 방송법 개정안이 처리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해 7월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소속 의원 162명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 처리를 줄곧 반대해왔으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MBC)의 여야 추천 이사진 구성이 역전되기 시작하자 입장을 급선회했다. 자유한국당 김태흠 방송장악저지투쟁위원장은 “여당은 자신들이 발의한 방송법을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방송법은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10일 <한국방송> 이사 선임에 국회 등 정치권의 영향력을 아예 차단하는 내용의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민주당 간사인 신경민 의원은 9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정의당, 방송통신위원회, 시민단체 모두 각각 방송법 개정안을 발의 또는 제안할 예정이기 때문에 지난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은 ‘원 오브 뎀’이 되는 상황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개정 법안들이 11월부터 두 달 동안 쏟아질 것”이라며 “여야가 복수 법안들을 놓고 병합 심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법안 통과를 전망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이런 태도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때 민주당 등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설령 방송법이 개정되더라도, 고 사장과 이 이사장이 이를 퇴진 조건으로 내건 것은 생색내기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방송법 개정안은 법이 시행되면 3개월 안에 공영방송 사장 등 경영진·이사회 재구성 등을 담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경영진·이사회를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고 사장과 이 이사장은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지 않아도 어차피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 본부(새노조)는 <한국방송> 노조가 방송법 개정과 사장 퇴진을 연계하며 파업을 중단하는 것은 결국 고 사장 체제 수명을 늘려주자는 얘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방송> 노조 안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노조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한국방송> 노조의 한 지역지부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노조의 결정은) 조합원들 사이 논란이 있다“라며 “방송법 개정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 사장과 불확실한 협상을 했다”라고 말했다.
박준용 김규남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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