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널 뉴미디어 시대를 맞아 위기에 봉착한 지상파 방송들이 코로나19 사태로 경영 환경이 더 악화하자 이른바 ‘생존 경영’에 돌입했다. 지난해 꺼내 들었던 ‘비상경영’ 카드에 이어 허리띠를 더 졸라매지 않으면 고사할 수 있다는 절박감을 드러낸 것이다. 업무추진비, 취재활동비 등 일상 경비 축소와 제작비 조정뿐 아니라 언론사별로 조직 개편이나 임금체계 정비 등 슬림화를 모색하고 있으나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 한국방송, 디지털 직무형으로 조직 개편 <한국방송>(KBS)은 올해 사업 손실을 1270억원으로 추산한다. 이에 지난 1일부터 섭외성 경비 등 일반사업경비 78억원과 프로그램 제작비 111억원 축소 등 연간 189억원을 절감하는 안을 내놓았다.
양승동 한국방송 사장은 이달 조회사를 통해 “코로나19가 초래한 세계적 경제 위기로 인해 한국 경제가 역성장한다면 상황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 몸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며 고통 분담을 호소했다.
한국방송은 생존 가능한 미래를 위한 정교한 설계도인 종합계획을 2분기 안에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혁신추진부에선 조직을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후속 조처를 진행 중이다. 비용을 줄이는 단기 처방뿐 아니라 내리막인 광고 매출 등 수입 현황 타개를 위한 또 다른 선택지를 찾는 작업이다. 황상길 전략기획실 대외협력국장은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 역할을 부여하는 조직 설계를 하는 것으로 디지털 직무형 조직화가 모토다. 한두달 걸릴 일이 아니고 중장기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노조에선 알맹이 없는 대안으로 직원 희생만 강요한다는 반박 성명이 나와 험로를 예고했다.
■ 문화방송, 퇴직금 누진제 등 임금체계 개편 문화방송도 이달부터 기자 취재비, 피디 업무진행비 등 진행성 경비 30% 삭감에 나섰다. 지난해 8월 시작한 비상경영으로 이미 경비 20%를 줄인데 더해 허리띠를 더 바짝 죄며 연 300억원 절감을 목표로 세웠다. 1차로 일반 경비, 2차로 제작비, 3차로 인건비 등 단계별 손질을 검토하며 새로운 수익을 찾는 활로도 모색한다. 2018년부터 연간 1000억원대 적자에 올 1분기에만 벌써 242억원 적자를 기록해 경영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문화방송은 선택과 집중 전략을 내세운다. 강지웅 기획조정본부장은 “공익성이나 화제성 등을 평가해 꼭 필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은 빼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 중심으로 투자하려고 한다. 단순히 비용 절감만이 아니라 새 미디어 환경에 맞춰 좋은 연출자·작가를 발굴해 창발적이고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 계획”이라고 밝혔다. 3단계인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노조와 실무협의에도 나섰다. 오동운 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장은 “사 쪽은 비용과 체질 개선을 우선 고려해 퇴직금 누진제 폐지를 거론하고 있다. 조합원 임금 축소가 불가피해 범위와 수준 등을 놓고 교섭 중이다. 내용이 정리되면 대의원들의 의견 수렴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 에스비에스, 구내식당 공짜 저녁밥 중지 <에스비에스>(SBS)도 이달부터 통상적 비용 일괄 조정과 제작비 5% 축소 등 연 150억원 비용 절감에 나섰다. 2년 전부터 야근자들을 위해 시행했던 구내식당의 무료 저녁 제공도 한시적으로 중단했다. 박정훈 사장은 지난 8일 담화문을 통해 “드라마 부문에서 1분기에 괄목할 성장을 했지만, 광고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100억원 줄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달 광고 판매가 40% 역성장해 120억원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코로나19 사태 등이 야기한 불확실한 경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단계적 비용 절감안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노조에선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 ‘고통 분담’이라는 명분엔 공감하지만, 미래 비전 전략 제시나 사전 협의 없이 진행하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윤창현 언론노조 에스비에스본부장은 “제작비를 줄이면 비정규직 인력까지 영향이 미친다. 취재활동비 삭감 등은 현장 손발을 묶고 좋은 기사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에 아무런 협의 절차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경영 위기 대처 방안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콘텐츠 경쟁을 하는 방송사들로서 가장 큰 고민은 프로그램을 만들수록 적자가 가중되는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지웅 본부장은 “제작비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광고 수입은 줄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순간 적자가 된다. 중국 시장이 막히면서 제작비 회수가 안 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한국방송협회는 이달 초 지상파 방송이 독과점 체제일 때 만들어진 중간광고, 방송통신발전기금 등 비대칭 규제 해소를 촉구했다.
막말·편파·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는 종합편성채널에 밀려 지상파가 휘청이면 저널리즘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 속에 뉴스 부문의 공적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김선호 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지상파 방송이 혁신과 개혁을 한다고 해도 10년을 장담하기 어렵다. 제작비가 줄어 고품질 콘텐츠가 줄어들면 유튜브와 질적 구분이 안 될 수 있다”며 “미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시민들에게 일정 액수의 바우처를 배분하고, 시민은 이를 자신이 원하는 언론사에 기부하는 미디어 바우처 제도처럼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공적 지원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현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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