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 정원에서 창간 당시의 상황 등에 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18일 1만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1988년 5월15일 창간됐으니 정확히 32년 하고 3일 만이다. 한겨레 창간의 주역인 임재경 초대 편집인 겸 부사장은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주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함께 고통받던 우리 국민 전체의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라고 회고했다. 임 전 편집인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한국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뒤 민주언론운동에 매진해오다가 19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다.
임 전 편집인은 1991년 8월10일 한겨레 지령 1천호 신문 1면 칼럼 ‘지령 1천호를 맞이하며’에서 “한겨레가 이 시대 최고의 공공재로 남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임 전 편집인은 “한겨레는 여러모로 차별받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고 한반도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막아 평화를 모색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며 “물론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말했다.
임 전 편집인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했다.
―한겨레가 5월18일 지령 1만호를 발행합니다. 한겨레 창간의 주역 중 한 분으로서 소감이 어떠신가요?
“지령이라는 건 사람으로 말해선 수명이고 생명체로 보면 생존 기간인데, 이게 꼭 오래간다고 해서 가치 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래서 지령만을 가지고 자랑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보세요. 100년이 되지 않았어요. 중앙일보도 5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과연 그 매체들이 제구실을 하고 있느냐를 볼 때 지령이, 그 신문의 존속 기간이 길다는 것이 바로 신문의 가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한국 언론사에서 세 매체를 꼽는다면 독립신문, 일제 강점기에 여운형 선생이 만든 조선중앙일보, 4·19 직후에 나온 민족일보를 듭니다. 그런데 독립신문은 3년을 못 채웠고, 조선중앙일보도 3년을 못 갔어요. 민족일보는 불과 4개월, 지령으로는 92호, 100호를 못 채웠어요. 한겨레는 이 세 매체보다 굉장히 오래 유지하고 있어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령 1만호라고 해서 좋다고 흥분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령 1만호라는 숫자가 아니라 한겨레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해왔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나는 한겨레가 100이면 100 사람 전체에게 만족감을 줬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에게 뭔가 기대를 안겨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고는 봅니다. 최근 몇년 동안만 봐도, 만약에 한겨레가 없었다면 ‘촛불 혁명’이 가능했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겠는가, 4·15 총선 결과가 이렇게 나왔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또 정치적 변화뿐 아니라, 한겨레는 여러모로 차별받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고 한반도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막아 평화를 모색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봅니다.”
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창간 당시 상황 등에 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1988년 한겨레 창간이 한국 사회에서 또 한국 언론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좁게 보면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자유언론 투쟁, 그리고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기자 대량 해직과 관계가 있죠. 그러나 길게 보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폭압적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전 국민적인 욕구가 한겨레라는 결실로 맺어진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한겨레는 한 시대가 만들어준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를 창간한 해직기자들도 조금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전부를 내걸고 만들었다는 긍지를 갖는 건 좋지만,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주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함께 고통받던 우리 국민 전체의 노력이 이뤄낸 거다,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시대가 만들어줬다고 하셨는데 당시 시대정신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신다면?
“정치적 폭압에 저항하는 것은 ‘천부의 권리’다, 요즘 자주 쓰는 말로 하면 ‘주권재민’의 원리입니다. 대통령이 주인이 아니고 이 땅의 평범한 국민이 주인이라는 겁니다. 촛불 혁명의 핵심이기도 하죠. 박근혜가 대통령이지만 당신이 주인은 아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당신 물러나라, 이게 성공한 게 주권재민의 원리죠. 물론 주권재민의 원리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선 한겨레 창간되던 무렵부터 움트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한겨레 창간 때 국내외 언론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랬습니다. 외국의 신문·방송들이 과연 이 매체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건가 의문을 나타냈어요. 당시 르몽드의 서울 주재기자와 여러 차례 만났는데 굉장히 비관적으로 보더라고요. 프랑스처럼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에서도 르몽드 같은 신문이 끊임없이 재정적 위험에 시달리는데 과연 한국에서 가능하겠느냐? 군부, 재벌, 관료, 또 조중동 같은 세력들이 한겨레 같은 신문을 용납하겠느냐고 냉정하게 본 거죠. 그런데 32년 동안 유지됐고 지령 1만호까지 발행했으니 정말 대단한 겁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1988년 9월 한국언론회관에서 지령 100호 기념 자축연을 했어요. 이름은 밝히지 않겠는데, 조중동 발행인 중 한 사람이 왔어요. 나와 악수를 하면서 인사말이 그래요. “이젠 자리가 좀 잡혀갑니까?” 이렇게 얘기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리는 거예요.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야 이놈아, 얼마나 가겠느냐”라는 표정이 역력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안 했죠.”
―한겨레는 세계 언론사에서 처음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표방한 ‘국민주 신문’입니다. 그만큼 창간 초기부터 신문 제작과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삼성이 요즘은 광고를 좀 합니까? 어때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비판적 보도 때문에 좀….
“창간 몇년 동안은 삼성에 전혀 말을 못 붙였어요. 기업은 어떤 매체하고도 적대적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겨레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거죠. 광고를 안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질 않았어요. 내가 면담 신청을 여러 차례 했는데 안 만나주더라고요. ‘너희들은 오래 못 간다. 그러니 너희들하고 적대적 관계를 맺어도 상관없다’, 이런 거였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잘못 짚은 거죠. 한겨레 미래를 잘못 짚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을 우습게 본 거죠.”
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에 설치된 ‘창간 발기 선언문’ 앞에서 창간 당시 상황 등에 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당시 노태우 정부의 탄압도 심했죠?
“대표적인 게 ‘리영희 선생 방북 취재 계획’ 사건과 ‘서경원 의원 방북 취재수첩’ 사건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1989년 1월 김일성 주석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일본 이와나미서점을 통해 북한에 편지를 보내려 했어요. 하지만 그해 3월 문익환 목사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으로 공안 정국이 조성돼 방북 계획을 접었죠. 실제로 편지도 전달되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가정보원)가 4월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를 걸어 리영희 선생을 먼저 연행했고 다음으로 나를 끌어갔어요.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보니까 한겨레신문사 등록 취소가 그들의 목표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노태우 정부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위해 박철언이 밀사로 북한을 드나들고 있었던 거예요. 남북기본합의서를 추진하는 쪽에서 한겨레를 때려잡는 것도 좋지만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되니 이 정도만 하자고 했다고 해요. 그래서 리영희 선생을 구속하고 나는 입건 상태로 어정쩡하게 묶은 거죠.”
―서경원 의원 사건 때는 안기부가 압수수색까지 했죠?
“서경원 평민당(평화민주당) 의원이 당 지도부에 알리지도 않고 1988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는데 윤재걸 기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취재를 했어요. 다만 평민당이 서 의원의 방북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 보도를 미루고 있었죠. 그런데 서 의원이 1989년 6월 당국에 방북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구속됐어요. 그러자 안기부가 서 의원의 방북 사실을 알고도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며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를 적용하고 윤 기자의 취재수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어요. 우리가 취재원 보호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부하자 안기부가 7월12일 새벽에 경찰 1개 중대를 동원해 편집국 압수수색을 강행한 거죠. 한겨레 임직원들이 회사 입구에서 온몸으로 막았지만 경찰이 철문을 부수고 들어와 취재수첩을 빼앗아 갔죠. 노태우 정부가 한겨레를 더 이상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보고 무리수를 뒀다고 봐요.”
―노태우 정부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한겨레 발행을 취소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렸군요. 국민주 신문은 세계 최초의 실험이었는데 신문사 내부 상황은 어땠나요?
“내가 자화자찬만 하면 안 되고 솔직히 얘기해야겠죠. 한겨레는 대주주가 없어서 흔히들 하는 얘기가 “주인 없는 신문”이라는 거예요. ‘중구난방’이란 말이 있죠. 여기저기서 떠들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신문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어집니까? 매일 만들어야 하고 오자 하나만 나와도 문제가 돼요. 그리고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이렇게 복잡한데 중구난방이었어요. 3년에 한번씩 사장 선출하죠, 편집국장 선출하죠. 그때마다 으쌰으쌰 하죠. 이 사람들이 신문을 만들려고 왔는지, 선거를 하려고 왔는지, 지금은 어떤가요? 그런데 중구난방의 반대가 뭔지 아세요? 일사불란이에요. 그런데 일사불란이 과연 신문이 표방할 가치일까요? 중구난방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한겨레가 갖고 있는 태생적 조건이에요. 처음부터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사불란한 신문을 표방하지 않았다면 중구난방을 감수하자, 그렇게 한 겁니다.”
―지령 1천호(1991년 8월10일) 발행 때 1면에 쓰신 기념 칼럼에서 “한겨레가 이 시대 최고의 공공재로 남기를 바란다”고 소망하셨는데 지금 한겨레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공공재라고 할 때 이게 영어로는 퍼블릭 구즈(Public Goods)인데, 상품이 아니라는 거죠. 신문을 한부에 1천원, 한달에 1만8천원 하는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상품이 가지는 조건에 얽매이면 곤란합니다. 누가 그래요. 한겨레는 ‘브랜드 파워’가 있다. 나는 그것에도 반대입니다. 상품으로서 가지는 위력은 거부해야 한다고 봐요. 그럼 뭐냐? 이 시대가 가지는 가치다. 신문은 그 가치를 구현해야 해요. 다만 공공재도 좀 염증이 나면 곤란하니까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줘야 합니다.”
―끝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내가 서두에 해직기자들이 좀 겸손해져야 한다, 한겨레를 자신들이 만들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 것처럼 지금 한겨레 임직원들도 겸손해져야 한다고 봐요. 다시 말하지만 한겨레는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늘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안재승 논설위원실장
jsahn@hani.co.kr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한겨레 국민주주
1988년 5월14일 오후 임재경 당시 편집인(앞줄 왼쪽)이 막 윤전기를 빠져나온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받아들고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옆으로 이돈명 이사, 송건호 대표이사. <한겨레> 자료사진
18일로 지령 1만호를 발행한 <한겨레>는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국민주 신문’이다. 7만명의 국민이 모아준 성금이 한겨레의 주춧돌이 됐다. 대부분 소액주주다. 200주(액면가 기준 100만원) 이하 보유 주주가 전체의 95%다.
한겨레 주주는 일반 기업의 주주와 다르다.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산 게 아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선 이 땅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염원에서 국민주 모금에 참여한 것이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도 한겨레 주주다. 모두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주주가 됐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주주로 참여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먼저 주주가 됐고, 몇달 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도 주주로 참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1987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설 때 한겨레 창간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창간 주주다.
노 전 대통령은 한겨레가 2005년 5월 ‘제2 창간 운동’을 하면서 발전기금을 모금할 때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대통령 월급으로 모아둔 예금에서 1천만원을 발전기금으로 내고 싶다는 뜻을 비공개로 전해왔다. 한겨레는 노 대통령이 기존 주주인데다 발전기금 기탁 자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계획이었다. 다만 노 대통령의 참여 사실을 따로 공개하지는 않고 발전기금 모금이 완료돼 기탁자 명단을 신문에 게재할 때 노 대통령 이름도 함께 싣기로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이를 알고 시비를 걸어왔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노 대통령이 자신과 뜻이 맞는 언론에는 각종 지원을,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각종 규제를 서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악의적 선동이었지만, 소모적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 대통령의 참여를 퇴임 이후로 늦췄다.
한겨레는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창간 이후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배당을 결정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주주 배당을 검토한 적이 있으나 회사 재정 사정 때문에 늦어진 것이다. 한겨레는 주주 배당을 공고하면서 “한겨레를 아끼고 응원해주신 주주들께 드리는 작은 보답”이라며 “지속가능한 언론사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