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박종운씨의 어머니 김양임와 아버지 고 박생기씨의 2008년 모습. 사진 박종운 주주통신원 제공
그리움의 시간. 한때는 그리도 간절했건만 바람 속의 먼지처럼, 불꽃처럼, 풀꽃처럼 소멸되어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고, 오직 퇴색한 기억으로만 남아 가끔 열어보는 꿈처럼, 그리움이란 단어도 똑같진 않겠지.
전북 완주군 동상면이라는 깡촌에서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나는 7살 때 동네 형들을 따라 시오리 길을 걸어 동봉국민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은 채 배움을 나섰다. 이에 농사짓던 부모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한 9살 터울 큰누나를 붙여 나를 전주 풍남국민학교에 입학시켰고, 이듬해 아예 이사를 해서 막노동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아버지(박생기·2011년 작고)는 처음 제재소에서 일하셨고 다음엔 연탄공장과 연탄배달을 거쳐 손수레로 이삿짐 등을 나르는 일을 하셨다. 어머니(김양임·1933년생)는 밭매기 품팔이를 하셨고,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끔 외국 우표 같은 걸 갖다주셨던 것을 보면 폐지 처리장에도 다니셨던 것 같다. 집짓는 곳에서 벽돌을 이고 옮기는 막일도 하셨고 아버지와 같이 연탄배달도 하셨다.
나는 부모님께 그야말로 귀한 장남이었다. 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께서는 내 위로 세 명의 자녀를 잃으셨다. 사인은 주로 아사다. 아니 정확한 것은 모른다. 알 수도 없었다. 의료진이 전혀 없던 깡촌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먹을 것이 절대 부족하던 시절, 어머니는 ‘피가 나빠 아기를 못 키운다’는 언어도단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1927년생 토끼띠인 선친은 할아버지께서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백부께서는 경찰이었고, 다른 숙부들도 학업을 마쳤지만 웬일인지 아버지만 학교 대신 산일을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해서 선친은 논마지기를 장만해 농부의 길을 걸으셨다. 일제말기 1944년에는 수풍발전소 건설에 노무자로 징용당해 해방 이후 돌아왔고,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의용군으로 허벅지 관통상을 당해 상이군인이 됐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로 챙겨주는 이가 없었다. 지난 1990년대 후반 어머니가 이런 사정을 동네 반상회를 통해 읍소한 끝에 40년이 지나서야 ‘6급 보훈 대상자’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 늦은 겨울에, 꽃피고 아름답던 봄, 여름, 가을을 지난 계절에 김영삼 정부가 하사한 ‘국가유공자증’을 어루만지던 선친이 떠오른다. 뒤늦게 얻은 아들처럼 뿌듯하셨으리라. 내가 뒤늦게 입대했던 군복무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안아주시던 모습, 제대 후 100일 열공으로 공사에 합격했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카투사로 입대한 필자 박종운(가운데)씨가 1986년 대구 ‘캠프 워커’에서 복무하던 시절 미군 룸메이트들과 함께했다. 사진 박종운 주주통신원 제공
그러고보니 새삼 그리움의 나날이다. 1981년 지방국립대에 입학했으나 ‘공돌이’가 싫어 반수를 한 끝에 이른바 ‘스카이’(sky)에 합격해 이듬해 서울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1985년 카투사(KATUSA)에 지원해 대구에서 군 생활을 했다. 미8군 헌병대 ‘캠프 워커’ 생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시절. 대체로 미군들은 우리보다 어린 나이의 직업군인들이었다. 문화와 성장 배경이 다른, 민족과 국가라는 이념의 틀 안에서 부딪히는 젊은이들과의 부조화. 결국 포항에 있던 미 해병대 기지 ‘캠프 무적’으로 파견근무를 가게 되었는데 이때 같이 간 해밀턴 병장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내게 카펜터스 남매의 팝송 ‘탑 오브 더 월드’ 테이프를 주고, 읽을 책을 주었으며, 자유로운 시간을 배려해주었다. 내 이름 ‘제이. 더블유. 팍’(J. W. Park)의 이니셜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연유로 할리우드 배우 ‘존 웨인’(John Wayne)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필자 박종운씨가 카투사 시절 경북 포항의 미 해병대 기지 ‘캠프 무적’에서 함께 파견근무한 미군 해밀턴 병장. 사진 박종운 주주통신원 제공
보고 싶다. 렉센터 아저씨도, 봉신 가드도, 트랜스레이터 아저씨도, 얄미웠던 헤어(Hare) 일병도, 인자했던 해밀턴 병장도 세월과 같이 모두 다 어디론가 떠나갔다. 하늘색 눈동자의 그 미군도 어느 하늘 아래 잘 지내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21세기를 같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만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헤어짐은 죽음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우리 일상 속에 있다. 지난 2018년 5월 회사 근속 30돌을 기념해 집사람과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불과 열흘 남짓 여행을 같이한 사람들과도 정이 들었다. 지난해 1월 타이완에 다녀올 때만해도 이렇게 여행의 자유가 통제될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리움은 순전히 나만의 몫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진다.
박종운 주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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