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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소리없이 온몸 바친 헌신 탕자들의 영혼 사로잡았죠”

등록 2019-01-16 09:01수정 2019-01-16 11:32

20세기 초 의료선교사 포사이드
활동 기간은 5년밖에 안됐지만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진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 새로운 삶 이끌어

자신의 귀를 자른 범인 용서하고
한센병 환자 부둥켜 안은 모습에
서자 이보한은 ‘걸인의 아버지’로
깡패 최흥종은 ‘나환자 아버지’로

“마지막 욕심에 망가지는 이 많아
포사이드 울림이 아직 생생한 건
마지막까지 다 비워버렸기 때문”
[인터뷰]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 펴낸 양국주 서빙더네이션스 대표

자신의 어머니의 수양어머니인 미국인 유하례 선교사를 모시고 양국주 대표와 부모 형제들이 찍은 사진을 가리키는 양 대표.
자신의 어머니의 수양어머니인 미국인 유하례 선교사를 모시고 양국주 대표와 부모 형제들이 찍은 사진을 가리키는 양 대표.
탕자를 걸인·나환우의 성자로 만든 선교사

예전엔 영웅전 못지않게 성인전이 필독서로 꼽혔다. 그만큼 난사람 이상으로 된사람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의 실현이 영웅시되는 세상에 욕망을 버리고 헌신하는 이들의 삶을 산 성인전은 갈수록 빛을 잃어가 이젠 전설이 되어간다. 현실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직도 성인의 족적만을 쫓는 이가 있다. 미국 워싱턴의 ‘서빙더네이션스’란 엔지오(NGO)의 양국주 대표(69)다. 국내엔 일제 강점기의 독일 출신 간호선교사(1880~1934) 서서평을 기리는 ‘서서평재단’으로 알려진 단체다.

그는 6년 전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란 이름의 ‘서서평’ 전기를 통해 ‘한국에도 인도의 테레사 수녀 같은 인물이 있었음’을 일깨웠다. 그가 이번엔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서빙더피플 펴냄)를 들고 고국을 찾았다. 의사인 포사이드(1873~1918)는 1905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병을 얻어 1911년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불과 5년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지울 수 없는 빛을 남겼다. <살아 있는~>엔 두 탕자를 구원한 사례가 등장한다. 여기서 구원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떠들면서 행실은 뒷받침되지 못하는 그런 류의 구원이 아니다.

먼저 ‘걸인의 아버지’ 이보한(1872~1931). 포사이드가 전주진료소에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05년 3월 김제의 부자 이경호 진사가 괴한들에게 맞아 다 죽게 생겼다며 진료를 요청했다. 조랑말에 의료장비를 싣고 급히 당도해 환자를 밤새 돌보던 다음날 새벽 괴한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포사이드와 괴한들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으나 수적 열세인 포사이드는 넘어져 쓰러졌고, 괴한들은 포사이드를 두들겨팬 뒤 한 쪽 귀를 잘랐다. 군산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구사일생한 뒤 범인이 잡혔고, 관찰사가 피해자인 포사이드에게 범인의 신병 처리 의견을 묻자 포사이드는 “내가 죽지 않았으니 죄를 묻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의견을 보냈다. 이보한은 이진사 부부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씨받이를 통해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모로부터 구박덩이로 자라고, 병치레를 잘못해 한 쪽 눈마저 잃어 울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폭행사건과 그 이후 포사이드의 모습을 지켜본 이 진사의 서자 이보한은 감명을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후 이보한은 광인 흉내를 낸 채 독립운동을 하면서 부자들에게 돈과 음식을 탁발해 걸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늘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이거두리’로 불렸다. ‘거두리’는 나라 잃은 망국민들과 자신처럼 상처입은 영혼을 거둔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조선인들과 함께 한 포사이드 선교사(맨 오른쪽)
조선인들과 함께 한 포사이드 선교사(맨 오른쪽)

선교사라고 다 같은 선교사가 아니었다

또 한명은 동네 깡패였다가 개과천선한 최흥종(1880~1966). 포사이드는 1908년 목포에서 활동하다가 광주진료소의 선교의사 오웬이 폐렴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다가 거적대기 위에 누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한 한센병 환자를 만난다. 당시 천형인 문둥병 혹은 나병으로 불린 한센병 환자들은 전염을 두려워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은 커녕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포사이드는 이 여인을 부둥켜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병원에 들어섰다. 그것이 나환우들을 돌본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돌봄의 기원이 되었다. 이때 오엔의 조수로 병원에서 포사이드를 본 최흥종이 큰 변화를 일으켜 ‘나환우들의 아버지’가 된다. 저자는 “포사이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말로 가르친 게 아니었다”며 “그의 내면에서 우러난, 소리 없는 행동이 보는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에 2천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왔지만, 다 서서평이나 포사이드 같은 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미국에서 포사이드의 말을 듣고 조선에 건너와 헌신한 서서평도 선교사들의 시기 질투로 고초를 겪었고, 포사이드가 폭행을 당했을 때도 ‘험지에 총도 들고 가지 않았다’고 비난하거나,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임지 변경 등 이익만을 모색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저는 어렸을 때 고향 정읍에서 본 선교사들이 사냥꾼들인 줄 았았어요. 선교사들이 내장산에서 말을 타고 쫓은 사슴과 멧돼지들이 논으로 도망치다가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죽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러면 선교사들은 저희 집에서 사냥한 동물들로 바비큐 파티를 하곤 했으니까요.”

포사이드가 살아 있는 건 자신을 던지고 버린 때문

양 대표의 어머니 김행이 권사는 서서평이 세운 성경학교 이일학교에 다니다 교사인 유화례 선교사(1893~1995)의 수양딸이 되었다. 유화례 선교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피난명령에 의해 모든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나 조선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남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양 대표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같은 선교사들은 덕수궁 옆 정승 집, 즉 가난한 백성들은 들어가 볼 수도 없는 곳에서 살며 별장을 가지고 즐겼고, 당시 전라도 선교관리자였던 윌슨이나 유진벨 같은 이들도 당시 조선 사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게 승마를 하거나 사냥을 하며 지냈다”며 “반면 서서평, 포사이드, 유화례 등은 가난한 조선인들처럼 살면서 그들을 도왔다”고 했다.

양대표가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유화례 선교사는 그의 아버지에게 3천환을 주었고, 아버지는 이를 밑천으로 쌀장사와 인쇄업으로 성공해 정읍의 대표적인 교회인 성광교회를 세웠다. 연세대 재학시절 전국학생연합 회장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회장을 하며 학생운동에 나섰던 양대표는 졸업 뒤 아버지의 인쇄업을 물려받아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 1987년 회사를 팔고 미국행을 결행했다. 그곳에서 외할머니 유화례 선교사를 모시면서 서서평과 포사이드와 같은 봉사 활동을 하는 재단을 설립해 인생2막을 시작했다.

그는 3년 전부터 만성신부전이 와 하루 4번씩 투석을 한다. 포사이드 탄생 100돌을 맞아 <살아 있는~>을 탈고하던 지난해엔 안신경마비까지 와 한쪽 눈만을 뜨고 원고를 손봐야 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을 그릴 때는 몸의 고통을 잊어버릴 만큼 기쁨이 넘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목사와 선교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나름대로 잘 살아온 분들도 말년에 자기 것을 움켜 쥐고 욕심을 부려 삶을 망가뜨리고는 해요. 서서평이나 포사이드가 우리 가슴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건 마지막까지 주님에게 자신을 던져버리고 다 비워버리고 헌신했기 때문이지요.”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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