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큰 사거리에는 우회전 곡선 차로와 교통섬을 만들어놓은 곳이 꽤 있다. 보행자는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하는데다 길모퉁이와 교통섬 사이에 신호등이 없는 경우도 많아 불편하고 위험하다. 보행자는 보통 지나가는 차가 없을 때를 기다렸다 길을 건넌다. 차들은 보행자를 보고도 쌩 지나가기 일쑤다. 왜 차가 아니라 보행자가 기다려야 할까? 위험한 도로에서일수록 약자인 사람이 우선이어야 하는 게 상식 아닐까?
나는 보행자다. 한번은 어느 혼잡한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데 우회전해 들어오는 차들의 행렬이 좀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작은 차 한 대가 내 앞에서 멈춰 섰다. 별일이다 싶어 운전석을 들여다보니 외국인 여성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게 먼저 건너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리고 겨우 1초나 지났을까, 꼬리를 물고 있던 뒤차 두세 대가 짜증 섞인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댔다. 내가 더 미안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사회에서는 친절해도 욕먹는다.
나는 운전자다. 자주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면 차를 운전한다. 내게는 작은 운전 원칙이 하나 있다. 우회전 차로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든 차선 없는 골목길이든, 어디서든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앞에 보이면 차를 멈춘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바로 건너가지 않고 웬일인가 어리둥절해하며 먼저 차를, 그리고 나를 바라본다. 내가 지나가라고 손짓하면 그제야 밝은 얼굴로 걸음을 내디딘다. 그러다 그 외국인 여성처럼 나도 뒷덜미에 따갑게 꽂히는 ‘빵빵’ 소리를 듣는 때도 있다. 그렇게 욕먹으면서도 보행자 우선 원칙을 지키는 것은 이타심이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도 보행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때에 따라 보행자이기도 하고 운전자이기도 한 것처럼 보행자와 운전자는 다른 두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 대부분은 더 많은 시간을 차 밖에서 보행자로 산다. 그런데 왜 우리는 차만 타면 그 사실을 망각하는 것일까?
걷거나 운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곤경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가르쳤다(<상유타 니카야>). 윤회의 인생관과 연기의 지혜에서 나온 자비심이다. 지금 누군가를 돕는 이는 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이였을 수 있다. 지금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후에 누군가를 보살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호적 관계에서는 주는 자의 우월감도 받는 자의 열등감도 없다. 보행자를 위한 운전자의 작은 친절처럼,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만나는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다른 순간의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를 볼 때마다 깨어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정경일(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