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마음을 모아 1만장이 넘는 ‘평화’ 글씨를 쓴 심상봉 목사.
전북 임실은 한국 치즈의 메카다. 유럽에서나 맛볼 수 있던 치즈를 임실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된 데는 종교의 벽을 넘은 신부와 목사의 협력을 빼놓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지난 4월 선종한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1931~2019) 신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심상봉(83) 목사다. 그 심 목사를 지난 4일 임실 치즈마을에서 만났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임실군이 의욕적으로 만든 치즈 테마파크를 지나서 있는 임실읍 금성리 중금마을이 바로 그 유명한 치즈마을이다.
이 치즈마을 산파인 심 목사는 ‘인생에서 두 번의 대전환기를 맞았다’고 한다. 한 번은 전남 장성에서 서당을 한 유학자 집안 풍토와는 전혀 달리 고교 때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또 한 번은 40년 전 임실에 와서 지 신부를 만나 농촌운동에 뛰어든 일이었다.
심 목사가 처음 임실에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은 이 시골구석에서 썩을 인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주 예수병원 직원이던 장모가 외동딸 사위를 내로라하는 목사로 만들려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해 서울신학대-숭실대 철학과-장신대학원까지 무려 10년의 공부를 마친 뒤였다. 3년만 있다 도시 교회로 옮겨갈 심산으로 부임했던 그는 이곳 청년들이 도무지 산골 촌무지렁이들 같지 않아서 놀랐다. 지 신부가 주도한 독서모임을 통해 공부하고 협동조합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사고가 트여 남달랐다. 철학도 출신인 심 목사는 유럽에서 이미 철학을 공부한 지 신부의 지적인 풍모와 열정에 심취했다. 지 신부도 협동조합운동에 심 목사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벽이 높아 지 신부가 교회에 가서 교육하기가 어려워 심 목사가 개신교인들의 교육을 맡아줬으면 해서였다. 그러나 심 목사는 ‘시골 사람들에게 신용조합에서 무담보로 돈을 빌려줬다가 밤차를 타고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발을 담그길 꺼렸다.
“그런데 외국인(지 신부)은 저렇게 우리 민족을 위해 신용조합을 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데, 한국인인 내가 제 민족을 못 믿어서 못하겠다고 하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협동조합운동을 위해 경제교육을 받아본 그는 ‘경제 질서를 모르는 철학이나 신학이 사상누각으로 여겨져 목사직을 때려치우려고 했을 만큼’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면서 지역신용조합운동의 부흥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협동조합이 지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부들의 운동권 양산소’라고 본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대부분 와해되고, 그 자리를 새마을금고가 대체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실에 유럽식 치즈를 이식하는 일은 결국 해냈다. 지 신부는 임실성당 신부로 부임해 산양을 키우다가 가난한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고국에서 본 치즈 생산법을 도입해 임실에 한국 최초의 치즈 공장을 만들었다. 이어 심 목사도 1990년대 기독교재단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에 교회 청년을 파견해 치즈와 요구르트 생산법을 배워 오게 했다. 또한 그 청년이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고, 농촌에서 스위스식 가정공장을 실현하도록 했다. 그것이 이곳 치즈마을의 싹이 되었다. 지금은 심 목사의 세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까지 이 마을에서 치즈를 만들고, 판매하거나 피자집을 하며 치즈마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심 목사는 “이 척박한 마을에 스위스 분들이 직접 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풀무원 설립자 원경선 선생은 일본 애농원 사람들을 데려와 교육을 해줬고, 서울대 농대 배인휘 교수도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며 “그런 외부의 조력과 이진화 전 치즈마을 위원장, 김상철 형제, 송기봉 현 위원장 등의 헌신적 내응이 합쳐져 치즈마을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부친이 전주에 사준 대지 400평 대저택을 다 날려먹을 만큼 농촌 살리기에만 몰두했다.
이런 농촌개혁가의 이미지와 달리 심 목사는 교회에 서당을 차려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친 훈장이기도 하다. 그만큼 옛사람인 그가 농촌 변화의 주역이 될 만큼 열린 것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아버지는 유학자였지만 그가 고교 때 크리스천이 됐음을 고백하자, 유학도였던 신라의 화가 솔거가 불교에 귀의할 때, 그 부모가 ‘불교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 되어라’고 했다는 일화를 전해주며 격려했다. 그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기보다는 넉넉하게 자식의 선택을 수용하는 부친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에게 열린 사고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이가 또 있다. 그는 “집성촌인 고향마을 문중인 심상국 형님은 깡패로 유명했는데, 어느 날 광주에 가서 유영모(1890~1981) 선생을 뵙고 와서 개과천선했다. 이를 보고 사람이 변하려면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유영모는 그 뒤 그의 고향마을에 자주 왔다. 그는 열일곱살에 유영모에게 유학의 핵심인 ‘중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유영모는 그에게 “칼을 갈아봤느냐”고 물은 뒤 “열심히 갈고 갈면 마침내 날이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한센인들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방 최흥종 목사와 동양화가 의재 허백련 선생이 광주 무등산에 설립한 삼애학원(광주농고 전신)에 다닐 당시 최 목사와 허 선생 집을 드나들기도 했다. 최 목사와 동광원 설립자 이현필 선생의 스승은 전남 화순 개천산의 이세종(1880~1942) 선생이다. 심 목사는 교회에서 정년은퇴한 2004년부터 7년간 이세종의 수도 터인 개천산에 머물며 수도를 하고, 서당을 하기도 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읽은 사람이 아니고 먹은 분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더는 제 몸뚱어리만을 위해 살 수 없게 된다. 또한 종교의 경계와 일체의 벽까지 뛰어넘어 평화롭게 된다.”
임실에 돌아온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평화’라는 말을 한자로 쓰는 수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1만장의 글씨를 써서 엔지오, 관공서, 국회, 유엔 등에 보냈고, 일본의 아베와 일왕에게도 보낼 생각이다. 그는 임실 치즈처럼 숙성시킨 ‘날이 보이지 않는’ 평화의 글씨를 다듬으며 말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것이 시기 질투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평화가 아니겠소.”
임실/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