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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등록 2020-02-19 18:00수정 2020-02-19 18:06

# ‘겉을 보면 속은 안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는 겉볼안이 쉽지 않은 게 종교인이다. 권위를 중시하면 허장성세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세속의 명리와 권력을 좇는 종교인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일반인이 종교인의 실제 속살림을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본인이 의도치 않게 속살림이 드러난 이가 있다. 최근 <수좌 적명>(불광출판사 펴냄)이 나왔다. 적명 스님의 유고집이다. 사실상 일기장이다. 본인이 지난해 말 갑자기 등산 도중 실족사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세상에 드러날 일이 없었을 글이다. 팔십 평생 책 한 권 낸 적이 없는 그였으니, 자신의 일기를 책으로 만들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봉암사 쪽에서 출간을 결정했다. 적명 스님 일기의 대부분은 1980년대에 쓰인 것들이다. 그가 40대 때다. 공자는 40대를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세상일에 더는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40대는 ‘흔들리는 갈대’다.

# “가슴속 부질없는 열기 식히며 헛된 상념들 잊고 싶다.”(1980.10.19) “잠시라도 속세의 재물의 이에 끌리지 않게 하옵고 색의 아름다움이나 명예의 빛남에도 지나 덕의 우울에 인한 인격의 고매함에 대해서조차 부디 마음 쓰지 않게 하소서.”(1980.11.1) “‘욕망의 부절제’, 그것은 속인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매우 부끄러운 상태에 있다.”(1981.8.20) “애초에 해탈 같은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은 것이다. 해 보기로 작정했다.”(1982.3.15) “근래 가끔 절망적인 공허감 속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 문득 돌이켜보니 의외로 세욕이 내 안에 주류를 이루고 있고, 구도의 마음은 먼지 같고 새털 같고 가벼운 연기와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 마음은 세욕으로 가득 찬 캄캄한 동굴이었고 번뇌로 들끓는 열탕이었다.”(1982.3.17) “어느 한 여인도 사랑하지 않으나 여인에 대한 욕망은 한이 없다. 잠깐이라도 마음 창문이 열리면 욕락은 잘도 쏟아져 흐른다.”(1982.7.31) “얼마만한 노력, 얼마만한 고심이 들어야 탐욕의 늪을 헤어나 한적한 곳에 안주할 수 있단 말인가?”(1983.2.4) “번뇌는 진정 나이와는 무관한 것이던가? 욕정의 불꽃도 줄지 않았고 명리에 대한 끝없는 탐욕도 예전 그대로다. 몸과 마음을 수도하는 도량에서 잠깐만 떼어 놓아도 천방지축 꺼꾸러지지 않는 곳이 없다.”(1983.2.17) “내가 순수하게 그 처녀를 사랑하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보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어야 한다. 순수한 사랑의 의미를 아는가?”(1983.7.7) “수도의 길을 버릴 수는 없으나 속된 욕망도 버려지지는 않는다.”(1983.11.30)

# 적명 스님을 아는 사람은 그가 소박 담백하고 솔직했다고 한다. 3년 전 직접 만나본 그의 모습도 소탈했다. 종정, 방장, 조실 자리를 탐하고, 총무원장까지 지내고도 세욕을 그치지 않는 현실에서 그는 그런 허명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수행자인 ‘수좌’로 머물렀다. 날씨와 기후처럼 천변만화하는 게 살아 있는 자의 생각과 감정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힘들고 아프고 강퍅하고 속좁고 기쁘고 들뜬 생각과 감정들을 들여다볼 눈이 어두워진 것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수좌 적명이 평생 매달린 화두선을 제시한 대혜 종고(1089~1163)는 ‘성인구심불구불(聖人求心不求佛) 우인구불불구심(愚人求佛不求心)’이라 했다. ‘성인은 마음을 찾지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만 구할 뿐 마음을 찾지 않는다.’ 밖으로 치닫지 않고,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이렇게 명쾌히 보는 자는 누구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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