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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최악이 안 왔을지 모르지만 우린 최선을 선택한다

등록 2020-03-04 10:31수정 2020-05-08 11:13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원제: A Paradise Built in Hell·‘지옥에 세워진 낙원’)에서 재난이 닥칠 때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최악이 아닌 최선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관념적 이상이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1906년 4월18일, 지진이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을 때 권력자들은 혼란을 예상하며 ‘엘리트 패닉’에 빠졌지만 시민들은 침착하게 서로를 보살피며 ‘재난 유토피아’를 실현했다. 각자의 무너진 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회적 연대의 ‘낙원’을 세운 것이다. 여덟살 때 그 낙원을 체험한 도러시 데이는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사랑했다”고 회고한다. 솔닛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9·11 참사, 태풍 카트리나 등 현대의 재난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준 비범한 사랑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그런데 오늘의 코로나19 사태처럼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지진이나 태풍 같은 가시적 재난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서로에게 다가가 도울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재난에서는 남을 도우려다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선한 의도의 행동마저도 치명적 위험으로 바꿔버리는 것이 감염병 재난의 악마성이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 안의 ‘최선’을 파괴할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 재난에서 우리는 ‘나’의 안전과 ‘너’의 안전이 분리될 수 없음을 몸으로 체험한다. 내가 건강해야 이웃이 건강할 수 있고 이웃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 모두가 안전해질 때 재난은 종식된다.

코로나19의 ‘의료적 백신’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사회적 백신’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재난 속에서 시민사회가 보여주는 ‘연대’가 그것이다. 지난달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대구에서 봉사할 의료진을 모집했을 때 단 며칠 만에 800명이 넘는 의료인이 자원했다. 사실상 전국이 비상 상태지만 피해가 더 심한 대구·경북 지역 시민을 위한 지원과 응원이 각지에서 이어졌다. 며칠 전 광주 시민단체들과 지방자치단체는 ‘달빛동맹’(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 자매도시 대구의 확진자들을 광주 병원들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40년 전 계엄군에 포위당해 고립되었으면서도 외롭지 않았던 것은 ‘수많은 연대의 손길’ 덕분이었음을 기억하는 광주 시민이 오늘의 대구 시민을 고립 속에 내버려두지 않겠다며 연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이렇게 재난 속에서 사회적 연대의 낙원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사적 존재에서 공적, 관계적 존재로 변화해간다.

낙관할 수는 없다. 재난은 장기화될 수도 있고 ‘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한달 동안 바이러스에 맞서 함께 싸우면서 우리가 자각한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겐 ‘최선’을 선택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재난 속에서 혐오와 배제가 아닌 사랑과 연대를 선택할 때,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은 곳, 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

정경일(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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