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남녀-성소수자 특집> 방송화면 갈무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양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작가 은하선.
“나 7년 전에 어떤 작가·피디에게 이런 말 한 적 있어. 게이·레즈비언·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이 같이 나와서 토크쇼하면 안돼? (그랬더니)
‘안돼. 난리나. 한국에선 할 수가 없어’라고 했거든. 근데 7년 뒤에 드디어 생겼어. 할 수 있었어. 너무 발전되는 거 같아. 난 감동했어. 이걸 계기로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어.”
-<까칠남녀: 모르는 형님 성소수자 특집>, 후지타 사유리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는 자신이 패널로 참여하는 교육방송(EBS) 토크쇼 <까칠남녀> 녹화를 마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7년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성소수자 토크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데 대한 소회였습니다. 하지만 사유리의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7년 전 작가·피디의 말대로 대한민국은 지금 그 ‘성소수자 토크쇼’를 빌미로 해서 ‘난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 학부모단체 “동성애 조장 방송 폐지하라”
국내 최초의 젠터 토크쇼를 표방한 EBS <까칠남녀>의 시청자게시판은 16일 (양성애자 패널인) 작가 은하선을 ‘하차시키라’는 의견과 ‘하차에 반대한다’는 반대되는 의견들로 도배가 됐습니다. 이제 종영 2회를 앞두고 있는 이 방송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까칠남녀>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2회에 걸쳐 성소수자 특집을 방송했습니다. 기존 패널 외에 성소수자(
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 3명이 추가로 참여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왜 커밍아웃을 했니?”, “언제 성정체성을 알게 됐어?”, “성정체성이 바뀔 가능성은 없니? 다시 다른 성별이 좋아질 수도 있잖아.” 기존 패널인 개그맨 박미선씨와 황현희씨 등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성소수자에 대한 궁금증을 거침없이 질문했고, LGBT 패널들 역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쾌하게 답했죠. 이날 패널들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볼까요?
“(조용히 있으라는 요구에 대해) 누군가의 존재가 인정받기 위해선 그 존재가 인지되어야 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우리는 더 떠들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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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미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레즈비언)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냐. 이해가 되는 것과 별개야. 100% 이해하거나 공감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받아들이는 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까칠남녀> 패널인 작가 은하선(양성애자)
혐오표현의 문제를 다룬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이 방송을 두고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중요한 문제를 짚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시청자들의 의견은 좀 달랐나 봅니다. 시청자 게시판에 ‘교육방송에서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항의 글이 잇따라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표현들로 뒤덮였습니다. 한 학부모단체는 EBS 사옥 앞에서 까칠남녀 방송 폐지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전국학부모교육시민단체연합회(이하 전학연)는 “사회문제인 성차별 이슈를 다룬다고 기획의도를 포장하더니 남성 혐오와 남녀 분쟁을 극대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젠더 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까지 조장하고 있다”며 “까칠남녀 방송을 중단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 EBS의 ‘은하선 하차’ 일방 통보…패널들 반발
여론은 느닷없이 <까칠남녀> 방송 처음부터 패널로 참여해 온 은하선에게 향했습니다. 은하선이 고정 패널 가운데 성소수자 정체성을 밝힌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일까요? 게시판 등에선 은하선에 대한 하차 요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결국 지난 14일 EBS는 은하선에게 일방적으로 프로그램 하차를 통보했습니다. 은하선은 “많은 패널 가운데 유일하게 LGBT로 커밍아웃(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하는 것)한 저를 하차시키고 가는 것은 명백한 성소수자 탄압이자 정치적 탄압”이라며 “특정 세력의 집회가 영향력을 행사해 실제로 제가 하차하는 것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분노한다”고 반발했습니다.
EBS가 ‘반동성애 집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은하선 작가를 하차시켰다는 비판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까칠남녀>에 출연 중인 작가 손아람씨, 손희정 문화평론가,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문화연구소 교수도 15일 ‘EBS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공동 성명을 냈습니다. 이들은 “<까칠남녀> 담당 CP는 하차 결정 이유로 은하선 작가가 ‘방송 출연자로서 부적절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이는 명백하게 성소수자의 입을 막아 존재를 지우겠다는 반동성애 집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이어 “<까칠남녀>는 한국 사회 성평등을 위해 노력해 온 프로그램”이라며 “프로그램 의도에 맞지 않는 성급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에 은하선이 없는 마지막 녹화 참여를 보이콧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역시 “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할 방송이 그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EBS를 비판했죠.
■ 트랜스젠더 방송인 하리수 “17년 전과 변한 게 없다”
현재 트위터 등 SNS에서는 EBS의 결정을 비판하는 누리꾼들이 ‘#까칠남녀_은하선_하차반대’ 태그를 공유하며 함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 트랜스젠더 방송인인 하리수씨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은하선 하차 관련 기사를 올리고 “17년 전과 변한 게 없다”고 일침을 놨습니다. 하리수씨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 놀랄 일도 아니지만, 데뷔 때가 벌써 17년 전인데 아직까지도 전혀 인권이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2002년 월드컵 축하 공연을 앞두고 ‘트렌스젠더는 싫으니 무조건 취소하라’는 축구협회 고위직의 입김으로 갑자기 공연이 무산된 과거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
성소수자인 이송희일 감독은
페이스북에서 18년 전 방송인으로서 처음 커밍아웃한 홍석천씨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EBS를 비판했습니다. 이송 감독은 “홍석천씨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뽀뽀뽀’에서 강제 하차된 게 2000년. 우리 정서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며 “17년 사이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모양새는 더 졸렬해졌다”고 꼬집었습니다. 실제 2000년 자의반타의반으로 강제 아웃팅된 홍석천씨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줄줄이 방송에서 하차해습니다. (
▶관련 기사: 누가 그의 결단을 유린했는가) 그리고 홍씨가 방송에 돌아오기까지는 13년이 걸렸죠. (
▶관련 기사: 13년 걸렸지만 돌아온 ‘배우 홍석천’ 반갑다)
■ EBS “출연자로서 결격 사유 두 가지 있다”
EBS는 성소수자 특집 이후 시작된 프로그램 폐지 집회 등을 무마하기 위해 은하선을 하차시킨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EBS 관계자는 1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EBS 출연자로서 결격 사유가 있다고 판단해 하차 통보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EBS 쪽의 설명을 종합하면, ‘결격 사유’로 언급되는 사건은 두 가지 정도인데요. 하나는, 최근 은하선이 자신의 SNS에 성소수자 특집에 항의하는 이들을 향해 “까칠남녀 PD님 연락처가 바뀌었다”며 담당 PD의 연락처가 아닌 퀴어문화축제 문자 후원 번호를 올린 일입니다. 해당 번호로 문자를 보내면 3000원이 후원금으로 빠져나가게 되기 때문에 ‘기망’ 행위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건은 2016년 은하선이 자신의 SNS에 십자가 모양의 딜도(자위 기구) 사진을 올린 일입니다. 종합하자면, EBS의 해명과 달리 두 번째 사건은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동성애 혐오 여론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법 6조2항 방송은 성별·연령·직업·종교·신념·계층·지역·인종 등을 이유로 방송편성에 차별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
방송법 6조5항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방송법 6조는 방송이 ‘성별·연령·직업·종교·신념·계층·지역·인종 등을 이유로 방송편성에 차별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차별 사유에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역시 포함되어야 할 겁니다. EBS가 다시 한 번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성 역할에 대한 갈등을 유쾌하고 솔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국내 최초의 젠더 토크쇼’라고 밝힌 <까칠남녀> 방송 취지를 되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