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쌓여온 인색한 난민 판례는 앞으로 지난한 소송을 밟을 제주 난민 신청자들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제주도에 체류 중인 예멘인 누르(28)는 끝내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법무부는 누르가 난민임을 주장했던 내전 등의 이유가 한국이 비준한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에서 말하는 난민 인정 사유(박해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민족,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누르는 법무부에 다시 이의 신청을 할 계획이다. 제주도의 한 난민지원단체에선 “희망이 없다.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비관했다. 하지만 내전 탓에 누르는 이의신청 말고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도, 제3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다.
예멘 난민의 오래된 미래
현재까지 제주도에 집단으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481명은 단 한 명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인도적 체류 허가자는 362명이다. 나머지는 누르처럼 인도적 체류 허가도 받지 못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의신청을 고민한다고 알려졌다.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소송을 시작할 터다. 이들은 변호사도 없이 법정에서 난민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판례들을 보면 법원에서 이들이 난민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1%도 안 된다.
제주도에 단체로 들어온 예멘인보다 먼저 ‘나는 난민이다’라고 주장했던 이들의 1심 판결은 2016년 4월22일부터 올해 8월30일까지만 해도 5436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실제 난민으로 인정받은 판결은 10여 건뿐이다. 2013년 난민법 시행 이후 햇수로 6년 만에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난민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정부가 직접 난민 인정 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한국, 일본, 홍콩뿐이다. 지금까지 쌓여온 인색한 판례는 앞으로 지난한 소송을 밟을 제주 난민 신청자들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다.
한국의 난민 보호 역사는 난민법 시행 전후로 크게 나뉜다. 1992년 한국은 난민협약을 비준한 후 출입국관리법에 난민에 관한 조항을 만들어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았다. 이 기간 난민 소송은 1천여 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2013년 난민법이 도입된 후 현재까지 난민 신청자 수는 해마다 1.5배 이상 늘어났다. 이의신청으로도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난민 신청자들이 법원에 사법적 구제를 신청하면서, 소송 건수도 덩달아 급증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가 11월2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한국 난민 판례 전수조사 결과는 난민 신청자 수와 소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후반기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첫 시도라고 볼 수 있다. 10월31일 서울 동작구에서 <한겨레21>과 만난 이 변호사는 “난민 판례를 분석해보려는 선행 연구들은 있었다. 하지만 난민법 도입 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판례들을 전수조사한 것은 처음이다”라고 했다.
분석한 판례는 1994년 1월1일부터 2018년 8월31일까지 선고된 난민 불인정 결정취소 판결 9003건이다. 실제 선고분은 어필이 국내 법원에서 ‘난민’ 키워드로 검색해 수집한 모든 심급의 판례(2001년 8월16일~2016년 4월21일 선고분 3567건)와 어필과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가 공동 수집한 지방법원에서 선고한 모든 난민 판례, 고등법원 및 대법원에서 원심을 취소한 판례(2016년 4월22일~2018년 8월30일 선고분 5436건)이다. 소송이 급증한 지난 3년간 판례 분석에는 심리 불속행으로 기각한 대법원 판결과 원심판결 이유를 그대로 인용한 고등법원 판결은 제외했다.
이일 변호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판례를 남긴 한국 법원은 난민 보호를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1994년 이후 난민 판례 전수 분석
이 변호사는 “국적, 성별, 연령 등을 분석하는 정량평가가 학술적으로 가치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 난민 소송 기각률이 99%에 이르러 신청자들의 현황과 기각 이유 등을 정량화하는 작업은 의미가 크지 않다고 봤다. 대신 의미가 있는 판례, 예외적인 판례 내용을 중심으로 판례 경향을 분석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판결은 대체로 다섯 가지 이유로 기각됐다. ①박해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민족,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등 난민협약에서 말하는 난민 사유가 아니라는 경우가 많았다. 법무부 1차 심사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누르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②개인에 의한 박해는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간단하게 봤다. ③주장만 있고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는 판결도 많았다. ④신청 동기를 의심할 수 있는 간접적인 사실들을 들어 박해 위험이 적다고 건너뛴 경우도 있다. ⑤진술의 신빙성이 낮아 앞으로 박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도 판단했다.
법원이 난민 신청자에게 지우는 입증책임과 그 방법, 정도의 수준은 지나치게 높았다. 예멘처럼 전쟁 또는 내전이 소송 당사자의 국적국에서 발생해도, 난민법이 정한 난민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난민 지위를 부정했다. 소수민족인지, 전쟁 지역에서 소수 종교여서 박해에 더 시달리는지, 전쟁터에서 보호자가 없는 여성 또는 아동인지, 정부나 테러 집단에 반대 의견을 드러냈는지 등 난민 사유를 인정받을 가능성까지 닫아버리는 조처였다.
원칙적으로 유엔난민기구 난민 편람은 난민 신청자의 ‘진술’만으로 사실관계를 입증할 수 있다고 본다. 급하게 몸을 피한 난민은 객관적 증거를 제출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법정은 아니었다. 법원(서울행정법원 2018. 1.9. 선고, 2017구단31890 판결 등)은 난민 신청자의 주장을 인정할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원래 국적국으로 돌려보내면 곧바로 형벌에 처할 수 있는 형사판결문 등을 내도 외국 공공기관이 작성한 공문서라는 사실까지 다시 증명하게 해 무한한 입증책임을 지웠다.
법원은 난민 신청자의 ‘허위 진술’에 속을까봐 지나치게 보수적인 판결을 내놨다. 난민 신청자의 동기를 의심할 만한 간접 사실들을 늘어놓았다. 난민 신청 시기가 늦춰진 이유는 정보 부족일 수 있고,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 설명할 수 있는데도 난민 신청이 입국 직후 이뤄지지 않으면 ‘동기가 의심된다’고 봤다. 객관적으로 박해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따지는 과정이 생략된 채 ‘의심스러운 이유’만 언급했다.
난민 신청자의 박해 위험을 부정할 만한 간접적인 사실들을 예로 드는 소극적인 해석도 되풀이됐다. 국적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입국한 경우, 박해 원인이 오래전에 발생한 경우, 국적국에서 출국하기 전까지 특별한 박해를 받지 않은 경우, 정상적으로 출국한 경우, 박해 주체를 명확하게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 등이었다. 이런 이유가 있다면 국적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박해받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법원의 반복되는 논리다.
박해에 대한 협소한 해석
난민협약에서 말하는 박해는 ‘난민 신청인에게 국제적인 보호가 필요한가’다. 하지만 법원은 앞으로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따지지 않고 실제 난민 신청자를 국적국으로 돌려보내면 형벌을 곧장 집행할 정도의 ‘정부의 주목 가능성’을 따졌다. 주요 인사가 아니어서, 일반 시위 참가자나 일반 당원에 불과해 박해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봤다. 또 적극적인 활동이 없어 ‘정부 주목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청구를 기각한 판례도 있다.
국제적인 규범을 구체적으로 고려해 박해 위험을 인정한 판례도 적었다. 법원(대법원 2017. 1.11. 선고, 2016두56080 판결)은 사회적 비난, 불명예, 수치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성적 지향을 숨기는 ‘동성애자의 성정체성 표현의 자유 박탈’을 박해로 보지 않았다. 대신 난민 신청자의 성적 지향을 이유로 통상적인 사회적 비난의 정도를 넘어서는 신체 또는 자유에 대한 위협과 중대한 침해나 차별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박해에 해당한다고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종교 행사의 자유 박탈’에 대해서도 법원의 판단은 비슷했다. 법원(서울고등법원 2018. 1.18. 선고, 2017누74803 판결)은 종교를 공개할 경우 국가로부터 차별을 당할 수 있어 스스로 종교를 숨긴 것만으로는 박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변호사는 “‘종교 행사의 자유 박탈’을 박해로 해석하지 않은 판결은 부당하다. 정치활동 또는 종교활동을 몰래 해야 한다면 정치 또는 종교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박탈된 것과 마찬가지여서 박해로 봐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 판결에 영향을 끼치는 기준이 된다. 폭넓게는 법무부의 난민 1차 심사와 이의신청 심사에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왔다. 한때 대법원(2012.4.26. 선고 2010두27448 판결)은 박해 경험에 따른 정신적 충격이나 난민 신청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 시간 경과에 따른 기억력의 한계, 문화적·역사적 배경 등을 열어두고 전체적인 신빙성을 평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결정했다.
또 대법원은 난민 신청인의 진술을 평가할 때 세부 내용이 일치하지 않거나 일부 과장돼 보여도 곧바로 신청인 진술의 전체적인 신빙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도 판단했다. 하지만 이후 대법원(대법원 2016.3.10. 선고, 2013두14269 판결)은 진술만으로도 난민 신청인의 주장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사실을 포함해야 하고, 중요한 사실의 누락이나 생략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일관성과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 다른 증거와도 부합해야 한다고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상급심의 보수적인 경향에도 하급심에서는 의미 있는 판결이 가끔 나오고 있다. 난민 인정 심사 과정에서 절차적 위법성을 인정한 경우도 있다. 이 변호사는 “과거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소송만 있었다면 최근 난민 심사 과정의 절차적 위법 여부 등을 고려하는 판결이 나온다는 데 의의가 크다. 난민 신청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난민협약과 국제적인 규범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사례들”이라고 했다.
절차적 위법 짚는 전향적 판례도
난민 인정 심사의 핵심인 면접에서 부실한 질문과 신청자의 진술 왜곡, 면접 조서 내용을 확인해주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묻지 않은 경우 절차적으로 위법하다고 본 판례도 나왔다. 미성년자인 난민 신청자에게 면접하지 않은 경우, 남편을 면접했다는 이유로 아내의 면접을 생략한 경우 절차적 위법이 인정되기도 했다. 난민이나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았으면 한국에 들어올 때 비자 신청서에 허위 사실을 적었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난민으로 충분히 인정할 만한 사람을 법무부 1차 심사에서 신속하게 보호하는 조처가 절차적인 낭비를 막고 난민들에게 불필요하게 돌아갈 피해를 줄일 근본적인 대책이다. 다만 동아시아권에서 가장 많은 판례를 내놓는 법원 역시 국제적인 규범에 맞지 않는 판례들을 과감하게 변경해야 한다. 아무리 그때 판단이 맞았더라도 지금은 틀릴 수 있다. 하급심 판결에 잘못된 영향을 주거나 판결이 역행하지 않도록 선도적 판례가 나오길 바란다”고 했다.
조윤영·이재호 기자
jy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