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생활가정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6살 정해원(가명)씨는 2013년 성인이 되면서 그룹홈에서 퇴소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정씨가 살던 지역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예산이 부족하다며 법에 규정된 자립정착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정씨의 생활은 비참했다. 전문대학교 등록금은 장학재단을 통해 어떻게든 구했지만, 입학금과 교비, 용돈과 생활비는 혼자 벌어야 했다. 어느 날엔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다면서 아버지의 명의의 자동차 관련 비용 영수증이 날아오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정씨 명의로 인터넷이며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요금을 납부하지 않는 바람에 납입독촉장이 날아왔다. “이게 자립인가? 나는 또다시 버려지는 건가?” 정씨는 이런 생각을 매일 했다고 털어놨다. 겨우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정씨는 현재 자신이 자란 그룹홈에서 보육사로 일하고 있다.
2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정책세미나’에서 소개된 정해원씨의 사례는 아동양육시설이나 그룹홈, 위탁가정 등에서 보호받다가 성인이 되면서 퇴소한 이들이 처하는 남루한 현실을 보여준다.
현행 아동복지법 제38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호대상아동의 위탁보호 종료 또는 아동복지시설 퇴소 이후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만 18살 이상이 된 보호 종료 아동에게 지원하는 ‘자립정착금’이 2005년 지방 이양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지자체의 재정 형편에 따라 지원 수준이 들쭉날쭉하게 됐다. 지난해 9월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2017년 시·도별 대학입학금 지원현황’을 보면, 보호 종료 아동에게 지원되는 대학입학금 또는 대학생활안정자금의 경우 광주
와 충남, 경남은 아예 지급하지 않은 반면 울산은 500만원을 지급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자립정착금 및 대학입학금 등의 지급이 지역별로 편차가 발생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이를 중앙정부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자체와 중앙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아동지원협의체를 설립해 이곳에서 개인별, 집단적 지원계획이 집행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23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 정책세미나’가 윤후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의 주최로 열렸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세미나에서는 보호 아동들의 자립 준비를 퇴소 전부터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보호가 끝난 청소년의 월평균 소득이 근로연령인구(18~65살)의 중위소득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비율도 2008년 10.1%에서 2016년 28.2%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최근 5년간 아동양육시설
이나 그룹홈 등에서 보호가 종료된 10명 가운데 4명은 연락이 두절되거나 자립지원통합관리시스템에 잡히지 않고 있다”며 “국가가 키워낸 애들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모르는 비율이 40%라는 건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양성일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실장은 이에 대해 “시설 등에서 보호가 종료된 아동의 사회정착을 돕기 위해 정부가 월 30만원씩 지급하는 자립수당을 이번 달부터 시범 사업으로 시작했다”며 “지원 금액과 기간을 늘리는 등 보완을 통해 내년부터 확대 시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궁극적으로는 보호종료 청소년의 자립 지원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도록 특별법 제정에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보건복지부에서 관리하는 시설 퇴소 청소년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하는 중장기쉼터에서 퇴소하는 청소년에 대한 지원도 통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 교수는 “보호 종료로 퇴소한 아동들뿐만 아니라 15살 이상부터 보호시설에 3개월 이상 거주한 경험이 있는 아동들이나 시설을 떠났더라도 부모가 제대로 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도 지원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번 세미나를 개최한 윤후덕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아동보호시설 등에서 퇴소하는 보호종료 아동이 매해 평균 2천명을 넘고 있는데 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위험에 대한 개선은 더디기만 하다”며 “아동복지법에 규정돼 있는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에 관한 사항을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지원 특별법’으로 이관해 체계적인 자립지원 정책을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변효순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장은 이에 대해 “보호 종료 아동에 대한 재정 지원체계 일원화를 위해 사전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며 “자립 지원 통계를 만들어 시설뿐만이 아니라 쉼터 등에서 퇴소한 아동들을 사각지대 없이 지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